최치원, 진정한 풍류란 접화군생接化群生이다
우리 전통사상에서 자유분방은 특이하지만 추앙받는 삶의 덕목이었다. 정치 지도자나 사회 리더가 지나치게 형식화된 규칙이나 절차에 얽매이면 그 사회 분위기는 무거워지고 사람들은 삶의 멋과 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했다. 왕만 홀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백성이 함께 즐거워야 한다고. ‘여민락與民樂’이 좋은 정치인 것이다. 민중이 절로 흥이 나려면 우선적으로 리더가 위선의 탈을 벗어야 한다. 딱딱한 절차와 규정에 얽매이는 강박증에서 벗어나 바람의 흐름처럼 자유롭고 유연한 삶의 원리인 풍류를 아는 선비야말로 민중을 살리는 진정한 리더가 된다.
남북국시대에 통일신라 출신인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은 고조선의 전통사상에서 바람처럼 흐르는 멋과 흥,신명이 나는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 선생은 이를 풍류도라고 명명한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생은 『난랑비서문鸞碑序文』에서 밝히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그 교敎를 창설한 내력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실은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모든 중생을 접화接化하는 것이다.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요,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교를 행함은 노자의 종지宗旨요, 악한 일을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최치원 선생에게 풍류란 방탕한 ‘주색잡기’가 아니라 ‘우리 겨레의 전통적인 선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풍류도는 이기적 유아唯我주의도 아니며, 군중심리로 획 일화된 전체주의도 아니다. 도리어 풍류도는 개체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휘가 공동체의 발전과 화합으로 이끌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선생은 풍류의 핵심 원리를 ‘접화군생接化群生’이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풍류는 이기적인 충동에 휩싸여 무책임한 태도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그런 방탕과는 사뭇 다르다. 한 사람의 자유로움은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 때 진정으로 얻어진다. 이렇듯 정치 리더나 사회 리더가 뭇 생명과 만나 서로 신나는 스타일로 변모하는 것 이‘접화군생’의 진정한 뜻이며 풍류의 원리인 것이다.
원효,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무애행으로 민중의 성자가 되다
원효(元曉, 617∼686)대사는 소승과 대승을 아우르고 경장, 율장 및 논장을 망라하여 100여 종의 240여 권을 지은 것으로 알려진 대단한 학승이다. 하지만 대사는 형식에 얽매이고 이론에만 매달린 책상물림이 아니다. 대사는 풍류도의 ‘접화군생’을 불교식으로 실천하여 왕실중심의 불교를 민중의 불교로 전환시킨 대단한 자유인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대사는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살면서『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권 『십회향품十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절필을 한다.”라고 했다. 원래 회향廻向이란 말의 의미는 보살이 대비심大悲心으로 현재까지 쌓은 공덕 전부를 일체一切의 중생에게 돌려서 그들을 구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러한 회향의 정신은 글로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실천을 요구한다. 이 요구 앞에서 대사는 붓을 꺾은 후에 광대처럼 박을 하나 쓰고 방방곡곡을 누비며 춤추고 노래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불경연구에서 중생구제로 삶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화엄경』의 한구절로 원효대사의 삶을 요약할 수 있다.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 풀이하면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하나의 도道’로 삶과 죽음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무애無碍’, 다시 말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얽매임이 없다는 것은 대자유인의 삶을 말한다. 실제로 대사의 삶은 파격 그 자체이다. 대사는 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동침하여 아들 설총을 낳으면서 파계破戒를한다. 이때부터 대사는 스스로 승복을 벗고 무애행을 실행하며 가난하고 버림받은 민중에 불교의 진리를 전한다. 이러한 무애행은 뭇 중생과 직접 만나 서로 변화하는 삶, 즉 풍류도의 접화군생의 불교식 버전인 것이다.
실로 원효대사에게 중생의 마음은 곧 진여眞如자체인 ‘한마음(一心)’인 것이다. 이는 고원한 절대적인 진리와 세속의 비루한 일상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대사의 사상을 고영섭 선생이 다음과 같이 표현한것은 대단히 적확的確하다고 하겠다. “아우르기(和(諍)會(通))란 안으로 부처가 되고(歸一心源) 밖으로 보살이 된다(饒益衆生).” 대사의 파격적인 무애행은 결국 이기적인 일탈이 아니라 대자대비한 중생구제의 길인 것이며 진정한 깨달음의 실현인 것이다.
서경덕, 기인奇人들의 학파 창시자
엄격한 성리학이 지배하는 조선시대에서 화담 서경덕(徐敬德,1489~1546) 선생은 자유와 파격의 상징이 된다. 화담 선생은 유학자이지만 과거시험을 과감히 버리고 벼슬도 거부한 채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춤을 추는 처사處士이다.
선생은 반상班常과 남녀의 구분이 준엄한 가부장적인 신분제 사회에서 차별 없는 평등을 ‘주재자인 원리原理를 인정하지 않는 일기一氣의 철학’으로 녹여낸다. 심지어 그 당시에 천한 기생이자 여성인 황진이를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고 제자로 받아들인다. 선생의 이러한 파격적인 개방성 속에서 뛰어난 제자들이 탄생한다. 대표적인 제자들로는 재세안민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토정 이지함과 자유분방의 대명사로서『전우치전』의 주인공인 전우치, 기녀 황진이,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 허엽 그리고 박순과 서기 등이 있다. 그의 수제자인 박순에게서 배운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리학적 예절이 어찌 인간의 자유를 얽매게 할 수 있느냐? 세상 살아가는 것을 천성에 맡기겠다.” 제자들은 선생의 개방성을 바탕으로 억압받고 착취의 대상이 된 민중에게 새로운 평등 사회(홍길동의 율도국)의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반면에 성리학처럼 지나친 도덕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통치자의 노력은 개체의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고 만다. 성리학자들에게 교화의 의미는 수직적으로 명령하고 번거로운 예식과 엄격한 법률을 고집함으로써 백성을 괴롭히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조선시대의 지배적인 사대부와는 달리, 화담학파는 대단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그들은 권력과 재물에 속박되지 않고 신분제의 예절과 법도를 넘어서 자유롭게 산다. 이러한 행동의 진정한 의미는 결국 세상에 거하면서 민중을 편안하게 하는 삶(在世安民)을 추구한 데 있다.
신채호, 노예정신을 거부하고 아나키적인 자유를 꿈꾸다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의 사상은 개혁적인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자강한 민족국가를 꿈꾸는 것을 넘어 전세계 차원의 민중의 대동 세계를 추구하는 무정부주의(아나키즘)로 발전한다. 선생 역시도 대단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로서 파격적인 행보를 서슴지않는다. 이 또한 마찬가지로 노예정신을 거부하며 사해동포적인 민중의 자유 공동체를 꿈꾸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로, 하루는 선생이 거적 같은 더러운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이를 본 벽초 홍명희 선생이 기겁하였다. 그러나 이 모습은 단재 선생이 처지가 어려운 병든 독거노인의 이불과 자신의 이불을 바꿔 그 노인이 추운 겨울을 견디도록 한 행동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이 보인 자유분방함의 본뜻이 결국 애민정신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1923)』에서 단재 선생이 파괴의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이족통치,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평등, 노예 문화이다. 선생의 자유분방함은 한마디로 노예정신과 착취제도의 거부하는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파격적인 파괴는 결국 건설을 위한 것이다.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결론적으로 단재 선생의 자유분방함도 혼자만의 충동적인 자유로움이 아니라 만민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우리 전통에 나타난 자유분방의 정신은 풍류도의 접화군생으로 출발해서 원효대사의 무애행을 거쳐 화담의 처사행으로 이어지고, 이는 단재의 무정부주의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모든 사람이 자유로울때 개인도 자유로운 법 이다.
글. 김성우 (철학저술가)
'안동, 안동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퇴계 선생 며느리 개가하다. (0) | 2015.08.03 |
---|---|
추사 김정희에 대해 (0) | 2015.07.13 |
안동 연혁 (0) | 2015.05.29 |
안동을 왜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 하는가? (0) | 2015.05.29 |
남존여비가 아닌 공경에 기초한 조선시대 부부관 (0) | 2015.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