낸터컷 항구를 떠난 피쿼드호는 수십 일을 남하하여 에콰도르 키토 부근의 열대 바다에 이르렀고, 흰 고래가 나타나거든 허파가 찢어지도록 외치라는 지시가 에이하브 선장으로부터 돛대 꼭대기의 망꾼에게 떨어지자마자, 난데없이 화자인 이슈메일은 고래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고래를 ‘수평 꼬리를 가졌고 물을 내뿜는 물고기’라고 정의하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래의 크기를 책의 크기에 따라 2절판, 8절판, 12절판으로 분류하였다. 2절판 고래에는 향유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 혹등고래, 멸치고래, 대왕고래가 속해 있고, 8절판 고래에는 솔잎돌고래, 흑고래, 외뿔고래, 범고래, 상어고래가 포함된다. 만세돌고래, 해적돌고래, 흰주둥이돌고래는 12절판 고래의 대표종이다. 향유고래의 머릿골에서 짠 기름은 구하기가 어렵고 가격도 비싼 탓에 의약품을 만드는 데 대부분 사용되었지만, 부자들은 이 기름으로 만든 양초에서 그을음이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요란한 숨소리를 내고 나타나는 솔잎돌고래는 뱃사람들 사이에서 향유고래의 전령으로 알려졌다. 만세돌고래라는 이름은 독립 기념일에 하늘로 모자를 던져 올리는 미국인들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피쿼드호는 망망대해에 갑작스레 나타난 오탈자誤脫字와 이물이 부딪힌 뒤 가라앉기 시작했다. 모비 딕의 환영 인사로 착각한 에이하브 선장은 세 번째 항해
를 위해 작살과 보트를 준비하라고 선원들에게 급히 명령하면서, 돛대 꼭대기에서 허파가 찢어지도록 외치지 않은 망꾼을 혼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평생 고래를 쫓아 세상의 거의 모든 곳에 닿아 본 그였건만, 그 어디에서도 단 한 번 발견한 적 없는 문자 앞에서 제대로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신의 저주를 저주하면서 묵묵히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음담패설과 음주와 뱃멀미 때문에 작취미성昨醉未惺의 상태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던 선원들은 모비 딕을 최초로 발견한 자에게 스페인 금화 15냥을 주겠다는 선장의 약속을 떠올리고 사방으로 버둥거렸으나, 자신을 수장시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끝내 알지 못했다. 간신히 목관을 붙들고 그 비극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는 다행히 이슈메일뿐만이 아니었다.
피로감에 눅진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그가 두 시간이나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자정 무렵이었다. 어머니의 장례 이후로 거의 삼 년 만에 택시를 타려고 2절판 서점 앞 정류장을 기웃거렸으나, 세 번째 항해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고양된 취객들 사이에서 그는 끝내 제 차례를 기다리지 못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자동차들과 삼원색의 교통 신호등 사이에 갇힌 채, 일면식도 없는 택시 기사와 한심스러운 대화를 이어가거나 의심 어린 눈초리를 교환하고 있는 상황을 상상하니 차마 택시를 멈춰 세울 수 없었다. 게다가 그의 몸을 비틀고 있는 울화를 다스리기에 택시처럼 밀폐된 공간은 적합하지 않았다. 4월 초순의 밤공기는 고양이의 털보다는 확실히 거칠었지만 두릅나무의 어린 순들보다는 훨씬 부드러웠기 때문에, 보폭이나 숨소리의 리듬만 잘 유지한다면, 비록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을 만큼 먼 거리였지만 집까지 걸어가는 게 아주 불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밤이 되어야 비로소 미덕을 드러내는 도시에선 어둠보다는 오히려 빛 때문에 사람들은 길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반쯤 감고 귀를 막고 얼굴을 바닥으로 향한 채 걸었다. 그랬더니 밤은 자동 항법 장치가 되어 번개 같은 번뇌와 우레 같은 유혹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길을 택하여 안전하게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세수를 하고 나서 곧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개다리소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그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탈자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창문을 열었고 스탠드를 켰을 뿐만 아니라 향을 피워 소반 위에 올려놓았다. 커피까지 마시려다가 그만두었는데, 지나친 각성의 상태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과장시켜 편지의 목적을 흐리게 만들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글로써 자신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 본 적이 거의 없는 그로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절실했다. 더군다나 그 편지의 수신인은, 평생 수천 권의 책들을 읽고 그보다 열 배 정도 많은 원고들을 읽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을 골라내고 다듬었을 출판사의 편집자가 아닌가.
그래서 고작 두 장 분량의 편지를 완성하는 데 나흘이 걸렸고, 퇴고에서 발송까지 다시 일주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그사이 그 책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더라면 아마 그는 그 편지를 찢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순수하고 강렬한 충동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까닭을 그 스스로도 이해할 순 없었다.
그는 자신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모비 딕》의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부터 자신을 사로잡았던 강렬한 인상과 흥분을 설명한 뒤, 갑작스레 등장하여 독서를 중지시킨 치명적 오탈자를 수정해 준다면 그 책을 서점에서 정상적으로 구매할 뿐만 아니라 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실수는 인간의 속성이지만, 에이하브 선장처럼 끊임없이 저항하는 태도만이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썼다. 지나치게 관념적인 문장인 것 같아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것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던 문장이었으므로 굳이 주석을 달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 편지를 부치고 돌아온 다음 날부터 그는 매일 다섯 번 남짓 우편함을 열어보았다. 유일한 휴일인 일요일에도 딱히 해야 할 일이나 만날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직 우편함을 확인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공방으로 나갔다. 기대가 빗나갈 때마다 편지의 알리바이는 더욱 정교해져 갔다. 평소 같으면 2절판 서점에 숨어들어 사냥하듯 책들을 추적하고 수렵물들을 그 자리에서 게걸스레 먹어 치웠겠지만, 《모비 딕》의 편집자로부터 회신을 기다리던 두 달 동안에는 자신이 마치 돛대 꼭대기의 망꾼이라도 된 듯 사방의 서가들을 하염없이 둘러보면서 향유고래의 전령이라는 솔잎돌고래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하지만 번번이 그 책의 개정판을 발견하지 못한 채 항구로 귀환해야 했을 따름이다.
고양이의 털보다 부드럽지만 역한 비린내가 묻어나는 7월 중순의 밤공기 속으로 퇴근하다가 그는 길을 잃고 한참 동안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간신히 빛의 미로 속에서 빠져나왔을 때 자신은 결코 회신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아직 읽지 않았어도 마치 오래전에 읽은 것처럼 모두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그 책은 그저 2절판 서점의 허영을 채우기 위한 구색具色에 불과하며, 고작 두 개의 오탈자를 수정하기 위해 초판을 회수하고 개정판을 배포할 만큼 선병질적 결벽증을 지닌 출판사가 살아남기엔 현실이 너무 척박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도저히 밤의 자동 항법 장치에 몸을 맡길 수 없어서 그는 결국 택시를 타고 관에 매달린 이슈메일처럼 도시 속을 한참동안 표류하였다.
창문을 열고 스탠드를 켜고 향을 피웠을 뿐만 아니라 커피까지 마신 뒤에 개다리소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자신이 직접 그 책을 번역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카페인 때문에 감정이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자신에겐 그런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천연두와도 같은 오류는 출판사 편집자가 편집하는 도중에, 인쇄소 직원이 인쇄하는 도중에, 그리고 서점 직원이 판매하는 도중에 얼마든지 책 안으로 숨어들 수 있었으므로, 현재의 상업적 제작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모든 책들은 생래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나서서 자신의 원고를 직접 책으로 출판하는 방법이 그나마 최선일 테지만, 작가 역시 항체를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고 엉터리 책들과 편견들에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안개 속에서도 그에게 끊임없이 길을 안내해 줄 완벽한 책은 절실하다. 하지만 원본을 필사한 자들의 종파와 언어에 따라 전혀 다른 텍스트로 읽히는 경전들은 결코 그것이 될 수 없었다. 오류나 오독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책이라곤 오로지 각국의 국어사전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그에겐 많은 불면의 밤과 향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훗날 《모비 딕》의 편집자가 개정판을 준비하게 될 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목적으로 《고래 사전》의 원고를 직접 쓰기 시작했다. 그 사전이 《모비 딕》을 이해하기 위한 가이드북은 결코 아니고, 고래라는 생물과 그것에 연관된 인간의 문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국어사전에서 골라내어 가나다 순서대로 정리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가령 고래 탐사 관광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또는 해안을 산책하다가 고래의 시체를 발견한 자들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백과사전처럼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래와 관련된 문헌들 속에서 찾아낸 문장들로 단어의 용례를 덧붙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국어사전 속에도 치명적 오류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십여 년 동안 발간된 모든 사전들을 일일이 대조한 끝에 2004년도 현산출판사에서 발간한 국어사전을 기본 자료로 선정하였다. 그 이후에 새로 추가된 단어들은 훗날 《고래 사전》 개정판을 만들 때 보충하기로 하고 일단 초판에선 제외하였다.
1) 이하 ‘쓰다’에 대한 정의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른다. 2) 허먼 멜빌, 《모비 딕》,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1, 183쪽. 이후 본 소설의 내용은 이 책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 3) 배의 앞부분. 선두船頭, 선수船首. 4) “내 영혼의 배는 세 번째로 항해를 떠난다네, 스타벅.”허먼 멜빌, 같은 책, 672쪽
* 위 소설의 저작권은 김솔 작가에게, 사용권은 〈쉼표, 마침표.〉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와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

글_김솔 1973 출생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공동 당선 2013 문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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