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안동 문화

왕생을 축원하는 이승의 마지막 길

이산저산구름 2011. 12. 14. 10:57

 



죽음의 발명, 인간의 위대한 창조
우리의 전통적 문화재에서 창안한 죽음은 복수의 1인칭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차원과 양상이 달라진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놀이이자 신명이 시작된다. 우리의 죽음이므로 서로 애달파하고 슬퍼하면서 벌이는 잔치와 놀이의 창조가 죽음에서 시작된다. 죽음의 소중한 완성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공동체적 신명으로 전환되는 것이 죽음의 신명난 마무리 놀이가 된다. 죽음에 대한 철학과 예술은 인간의 탁월한 발명품이다. 특히 죽음에 대한 신명난 놀이와 축제는 인간의 최고 발명적 고안이자 창조적 설계이다. 불교에서 이를 두고 생자필멸이라고 하는 명제로 간명직절하게 정리한 바 있는데, 이 말은 항구적 진리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어가며, 그러한 죽음이 저마다의 고유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자각하게 한다.

진도 다시래기는 엄숙한 철학, 신명나는 축제 등의 다면적 면모를 가지고 있어 죽음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수가 있다. 우리네 선인들의 죽음은 항상 이러한 충만한 철학적 자세와 신명나는 놀이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진도 다시래기는 일견 산만한 놀이 같지만 죽음의 철학과 신명을 극단적으로 예각화한 실례가 된다.



죽음의 신명, 놀면서 슬퍼하면서
다시래기는 전라남도 해안의 섬을 중심으로 전파된 특정한 놀이이다. 장례풍속에서 빈 상여놀이를 하는 전통이 특징적인데 이를 전남 진도와 같은 고장에서는 여러 가지 내용을 첨가하면서 다양한 구경거리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상을 당한 상주를 위로하고,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동 놀이로 새롭게 창안했다. 그러므로 빈 상여놀이를 하는 전통이 다면적으로 창안된 것이 바로 진도의 다시래기이다.

다시래기의 근간은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빈 상여놀이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가령 타민족의 기록인 『수서隋書』 동이전 고구려조에서 우리네 장례 풍속을 두고서 말한 “초종을 치를 때는 모두 곡하고 울지만, 장사를 치르게 되면 북을 치고 춤추면서 죽은 이를 보낸다初終哭泣 葬則鼓舞 作樂以送之.”는 기록은 우리네 장례 행위가 그들의 관점에서 특징적인 놀이의 형태로 부각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전통은 우리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점을 볼 수가 있으니, 경상도 지역에서는 이를 대도둠이라 하고, 강원도나 경기도에서는 손모둠•걸걸이 등으로 지칭하고, 황해도에서는 생여도둠•영천도둠이라고 하며, 전라도에서는 상여 흐른다고 하거나 섬 지방에서는 밤달애•대울림 등으로 지칭한다. 이들은 일정한 상례 시에 이룩된 특정한 조직과 연관되고 이들의 계가 활성화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 계꾼들이 모여서 일정한 놀이를 벌이는 전통이 일정하게 작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상두계•향두계가 특히 중요하며, 이들이 일정한 조직으로 일정하게 놀이를 하는, 전통을 잇는 집단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래기가 창안된 전례는 단순하지 않다. 자체의 전통 속에서 우러난 것이지만 외지에서 들어온 특정한 놀이와 일정 부분 관련되어 있으며, 유력한 증거로 흔히 떠돌이 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패 놀이와 유사함을 들어서 남사당패를 지적한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과연 남사당패였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와 동일한 성격의 집단은 오히려 사당패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느 쪽이든 다시래기에서 다양한 놀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자체의 전통과 외래의 전통을 융합하면서 새로운 놀이로 정한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시래기는 몇 가지 구체적인 놀이로 구성된다. 놀이의 바탕은 서로 유기적인 것은 아니고, 각각의 놀이 바탕이 자체적으로 완결되면서 삽화적 전개를 보인다. 주된 놀이 과정은 가상제놀이•거사와 사당놀이•상여놀이•가래놀이•뒤풀이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가상제놀이는 다시래기의 연희 목적을 해명하는 서장에 해당한다. 거사와 사당놀이는 장례의 근본 취지와 어긋나는 것으로 봉사•봉사처•중이 삼각관계를 벌이고 삼각관계 끝에 봉사처가 아이를 낳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죽음 끝에 성적인 탄생을 알리는 기이한 설정이 가장 특별한 내용이다. 상여놀이는 빈상여놀이의 전통 골격이 들어있는 대목이다. 이와 달리 가래놀이는 시신을 묻으면서 소리하는 전통을 재현한 것이다. 마지막에는 뒤풀이 여흥이 있다.

사람의 죽음이 발생하였는데 외설적인 성의 소재를 떠올리는 것은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의의가 있는 것임을 절감하게 한다. 죽음과 성은 거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서 기사회생하면서 죽음이 삶이게 하고 주검에서 생명의 환희로 전환하는 깊은 고민의 흔적이 반영되어 있다. 죽음은 사람의 갈등을 봉합하고 흩어진 사람을 모이게 한다. 화합의 극치가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지점과 바로 연결된다. 아이를 낳아놓고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탈춤에서도 이와 유사한 설정이 있다. 외설적 성이 소재가 아니라 외설적 성을 통해서 산 사람들의 새로운 길찾기가 시작되었음을 환기한다.

상여놀이는 상여를 두고 벌이는 놀이인데, 상두꾼들이 서로 발을 맞추고 상주를 태우면서 자신들이 진행해야 할 상여를 메는 놀이의 예행연습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상여놀이를 통해서 일련의 협화심을 발휘하고 놀이의 진행을 통해서 화합된 단결심을 구사하고 이 대목에서 상두꾼계의 위력이 발휘된다. 가래놀이 역시 매장 연습의 반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하늘에 두둥실 올라가 구름을 타고 극락왕생을 위해서 저승길을 나서는데 치장을 아끼지 않는다. 삼색의 예단으로 상여를 장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죽은 인물에 대한 극진한 예우를 위해, 혼인식 가마를 꾸미듯 상여의 치장과 차비를 아끼지 않는다. 상여놀이의 전통을 상여와 관련지어서 보게 되면 상여놀이와 소리는 한바탕 그 자체로 축제이다. 상여소리의 형식은 진양장단•중머리장단•중중몰이장단•자진몰이장단의 놀라운 형식적 창조를 거듭해서 전국적으로 가장 특별한 소리를 창안하였으며, 그 점에서 가래소리 역시 같은 양상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의 길, 새로운 시
다시래기는 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지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전통적인 연희이다. 삶의 목표가 죽음인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죽음이 또 다른 시작임을 알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놀이임을 명시한다. 다시래기는 ‘다시 낳기’에서 왔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근거일 성 싶다. 다른 수식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네 삶의 근본적 양상이 바로 이와 관련된다. 근심과 즐거움, 신명과 슬픔은 서로 반대로 뒤집으면 된다. 그러므로 감정의 중도가 요구된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은 관련이 있는 핵심적 공통점에서 바로 극단을 넘어서는 중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다시래기에서 말한 슬픔과 신명은 서로 뒤집을 수 있는 근간이 된다. 슬픔이 신명이고, 즐거움이 근심이므로 망자의 극락왕생이 산 사람들의 기쁨이 된다.

가뭇없이 사라지는 길이 인생의 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 너머에 깊은 다시래기가 존재한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 이 세상에 길이 남기 위해 인간의 환생이 이루어진다는 점을 다시금 환기하게 된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순종하는 일이 필요하다. 무덤에 묻히는 주검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시래기의 근본 사상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영원 너머에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세계관적 믿음이 바로 다시래기의 미학이다.

글 | 사진·김헌선 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사진·문화재청, 국립민속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