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섬마을에서 봄을 만났다
글쓴이: 병산 피재현 http://cafe.daum.net/bulm/EYKm/2270
賞 春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꽃처럼 흔들린다. 꽃은 바람처럼 부풀어오른다. 오후. 밀려 서 있던 차들이 등 떠밀리듯 내려가는 계산동 비탈 낮은 2층집 다방. 경계를 부수고 오는 당신을 나는 참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꽃잎을 마셔도 풀리지 않을 渴症. 비틀거리며 당신이 온다면 한 순간 그 비틀거림으로 당신을 몰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꽃처럼 바람처럼 나도 흔들린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2002)
무섬마을에서 봄을 보았다.
초경 무렵 계집아이들의 젖망울처럼 몽글몽글 어김없는 몸앓이를 시작했다.
한 떼의 상춘객들은 끊어진 섭다리를 위태롭게 오가며 물어지럼증을 즐겼다. 다질 돌을 실어 나르는, 내 아버지같이 여윈 농부와 내성천 강둑길을 걸어 마을버스를 타러 나가시는 촌로들...일요일에도, 해가 다 떨어져가도록, 그예 얼굴을 보이지 않는, 대처로 나가 사는 아들네를 기다리는 툇마루의 할머니. 도 닦으러 가는 듯 무심하게 해우당 쪽으로 길을 잡은 검은 고양이의 담 위의 산책까지.
봄은 참 무심하게 그 마을에서 노닐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비행기를 타고 하롱베이 공항에 내렸던 지나간 겨울처럼 봄은 따라오지 않고 그냥 거기에 있을 것만 같았다.
곧 꽃이 필텐데...열매를 매단 채로 꽃을 맞을 것인가? 그래서는 새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닐텐데...별 걱정을 하면서 웃옷을 하나 벗었다. 부엌에서 정짓문을 넘어 방으로 밀려드는 냉이쑥국 향처럼 봄이 내 속으로 들어왔으면 싶었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그리 애로틱하지만은 않아서 내 몸을 내어주고서야 갈증을 풀 수 있는 의식같은 무거움도 있는 것이다. 이 마을 솟대로 잡혀 있는 새 두 마리도 알몸인 채다. 오늘같은 날은 미치도록 하늘을 날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가 생긴다는 것은 사랑을 허락받은 날처럼 기쁘고 설레는 일일텐데....새는 날지 못하고, 비상을 꿈꾸는 가난한 마을 선비의 오래된 꿈을 담은 채 아직 미몽이다.
길 밤이 이슥토록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 마른자리에서 잠이 들었을까 바람이 불면 산은 온통 나무들의 아우성이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번져가고 바람이 잠시 잦은 틈을 잊지않고 부엉이는 소리내어 운다 사랑을 잃은 적막이야 어디 이 산에 비할까 가슴에 바람이 지나는 길을 내고 영롱한 별조차도 담겨지지 않는 큰 구멍을 내고 하루에 한 번은 꼭 소리내어 울어야 풀어지는 가슴 아주 멀리 가고 싶었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여행, 돌아올 곳이 없어 더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인생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메아리를 남기는 산 속 흰 뱀이 겨울을 나는 동굴에 방 한 칸을 얻어 지친 다리를 쉬고 싶었다(2003)
사람은 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지친다. 일 따위야 하루 종일 한들 코피밖에 더 흘리랴마는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함께 하는 일 속에서 우리는 상처도 받고 미움도 생기고 지쳐서 허덕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하고 삶을 연장해나가는 방법은 사뭇 다르다. 더러는 신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찬송하고 고백하고 반성하기도 하고, 더러는 또 다른 사람의 품 안에 들어서야 그 모든 상처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은 산을 오르고 들길을 걸으면서 바람 속에 물가에 슬그머니 짐을 내려놓기도 한다.
아프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고독하고 외로운 것이라서, 그 생애의 팔 할이 바람처럼 덧없는 것이기도 하고 구름처럼 가뭇없는 것이기도 해서, 일터에서 돌아와 누운 밤에는 통증이 온 몸을 훑어 꿈길조차 아픈 발을 절뚝거리며 걷게 만들곤 한다. 한 점 사심없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주 무섬마을을 다녀와서 2009.3.9.- |
'다시 읽고 싶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외수 의 '감성사전'에서 (0) | 2009.03.18 |
---|---|
대팻날을 갈아라 (0) | 2009.03.17 |
그래도 사랑하라 (0) | 2009.03.04 |
겸손과 용기와 헌신을 거울삼아 우리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0) | 2009.03.03 |
부서진 벼루 먹기 (0) | 2009.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