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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에서 봄을 만났다

이산저산구름 2009. 3. 10. 12:41

       무섬마을에서 봄을 만났다

                                            글쓴이: 병산  피재현   http://cafe.daum.net/bulm/EYKm/2270주소 복사

 

 

 

               賞 春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꽃처럼 흔들린다. 꽃은 바람처럼

                                                              부풀어오른다. 오후.

                                            밀려 서 있던 차들이 등 떠밀리듯 내려가는

                                                      계산동 비탈 낮은 2층집 다방.

                                                    경계를 부수고 오는 당신을 나는

                                                     참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꽃잎을 마셔도 풀리지 않을 渴症.

                                                      비틀거리며 당신이 온다면

                                        한 순간 그 비틀거림으로 당신을 몰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꽃처럼 바람처럼 나도 흔들린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2002)

       

 

 

  무섬마을에서 봄을 보았다.


  이 마을에도 사람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빈 집이 많았으나 마당 한 켠의 꽃나무들은

초경 무렵 계집아이들의 젖망울처럼 몽글몽글 어김없는 몸앓이를 시작했다. 

 

 

 

 

 

 

한 떼의 상춘객들은 끊어진 섭다리를 위태롭게 오가며 물어지럼증을 즐겼다.
  그 옆을 무심한 듯 장화를 신고 허위허위 들일을 나가는 동네 아낙과 경운기를 몰고 밭둑을

다질 돌을 실어 나르는, 내 아버지같이 여윈 농부와

내성천 강둑길을 걸어 마을버스를 타러 나가시는 촌로들...일요일에도, 해가 다 떨어져가도록,

그예 얼굴을 보이지 않는, 대처로 나가 사는 아들네를 기다리는 툇마루의 할머니.

도 닦으러 가는 듯 무심하게 해우당 쪽으로 길을 잡은 검은 고양이의 담 위의 산책까지.



  봄은 참 무심하게 그 마을에서 노닐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비행기를 타고 하롱베이 공항에 내렸던 지나간 겨울처럼 봄은 따라오지 않고 그냥 거기에 있을 것만 같았다.


 

 

 

 


  동네 뒷산을 한 바퀴 돌아내려와 마을을 휘감고 돌아가는 강둑길을 걸었다.
  거두지 않은 산수유 열매가 쪼그라든 채 산비탈을 깎아 만든 텃밭 가에 서 있었다.

곧 꽃이 필텐데...열매를 매단 채로 꽃을 맞을 것인가? 그래서는 새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닐텐데...별 걱정을 하면서 웃옷을 하나 벗었다. 부엌에서 정짓문을 넘어

방으로 밀려드는 냉이쑥국 향처럼 봄이 내 속으로 들어왔으면 싶었다. 

  알몸이 된다는 것은 때로는 무엇인가를 진실하게 받아들이는 의식일 것이다.

옷을 벗는다는 것은 그리 애로틱하지만은 않아서 내 몸을 내어주고서야

갈증을 풀 수 있는 의식같은 무거움도 있는 것이다.


  이 마을 솟대로 잡혀 있는 새 두 마리도 알몸인 채다.

오늘같은 날은 미치도록 하늘을 날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엇인가! 하고 싶은 그 무엇인가가 생긴다는 것은 사랑을 허락받은 날처럼 기쁘고 설레는

일일텐데....새는 날지 못하고, 비상을 꿈꾸는 가난한 마을 선비의 오래된 꿈을 담은 채 아직 미몽이다.


 

밤이 이슥토록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 마른자리에서 잠이 들었을까

바람이 불면 산은 온통 나무들의 아우성이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번져가고

바람이 잠시 잦은 틈을 잊지않고

부엉이는 소리내어 운다

사랑을 잃은 적막이야 어디 이 산에 비할까

가슴에 바람이 지나는 길을 내고

영롱한 별조차도 담겨지지 않는 큰 구멍을 내고

하루에 한 번은 꼭 소리내어 울어야 풀어지는 가슴

아주 멀리 가고 싶었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여행, 돌아올 곳이 없어

더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될 인생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메아리를 남기는 산 속

흰 뱀이 겨울을 나는 동굴에 방 한 칸을 얻어

지친 다리를 쉬고 싶었다(2003)


 

 

 


  사람은 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지친다.

일 따위야 하루 종일 한들 코피밖에 더 흘리랴마는 사람을 만나고 사람과 함께 하는 일 속에서

우리는 상처도 받고 미움도 생기고 지쳐서 허덕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하고 삶을 연장해나가는 방법은 사뭇 다르다.

  더러는 신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찬송하고 고백하고 반성하기도 하고,

더러는 또 다른 사람의 품 안에 들어서야 그 모든 상처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또 많은 사람들은 산을 오르고 들길을 걸으면서 바람 속에 물가에 슬그머니 짐을 내려놓기도 한다.


아프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고독하고 외로운 것이라서,

그 생애의 팔 할이 바람처럼 덧없는 것이기도 하고 구름처럼 가뭇없는 것이기도 해서,

일터에서 돌아와 누운 밤에는 통증이 온 몸을 훑어 꿈길조차 아픈 발을 절뚝거리며 걷게 만들곤 한다.


  오늘 나는 무섬마을에서 온전히 하루를 쉬었다. 마음은 더없이 평화로웠고

한 점 사심없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주 무섬마을을 다녀와서 200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