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길, 빛 그리고 나 (宗廟 답사기) 김태용 | ||||
I . 종묘(宗廟)는 섬이다. 서울 속의 섬이다. 종로를 오가는 그 많은 사람들은 종묘를 지척에 두고도 그냥 지나칠 뿐이다. 섬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하듯 종묘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건너야 할 것이 있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실의 묘(廟)건축이다. 매사에 중용, 절제, 검박을 미덕으로 여겼던 유교 사회에서도 특히 제례를 위해 조성된 공간으로, 당시 지배사상의 명징한 구현체이다. 이로 인해 왕권의 상징물이기도 한 만큼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최상의 재료로 건축했을 것임에도 치장은 극도로 제한하여 단청은 소나무 색을 닮은 단 두 가지 색으로 한정했고 형태나 장식 어느 것 하나 번잡하거나 어지러운 것이 없다. “대악(大樂)은 간이(簡易)하다”라던 조선의 음악관도 건축에서 엿보인다. 미켈란젤로는 “완벽이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떼어낼 것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가 조선의 종묘를 봤다면 “바로 이거야!” 하지 않았을까? 종묘는 유교사회가 가장 중요시한 덕목인 충(忠) · 효(孝)를 내외에 실천해 보이는 장(場)이자 현왕의 왕위계승의 정통성과 권위를 증명하고 상징하는 기념비로써도 기능했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오늘날 “가부장적 사회질서 유지를 위한 지배계급의 통치수단이었다”라고 비판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제례는 “조상과 후손이 만나는 기쁜 일”이라 하여 길례(吉禮)로 분류했던 그 고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강력한 왕권에 의한 강압이 있기 이전부터 조상숭배는 외부적인 형식에서 얼마간의 차이를 보일 뿐 보편적으로 존재했고 오랫동안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기층의 보편적인 공감대 없이 그러한 지지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내가 존재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그 조상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제사를 통해 그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예기(禮記)》에 의하면,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통해 “그들의 근원으로 되돌아가 옛것을 보존하며 자신을 존재하게끔 한 사람들을 잊지 않게 된다(禮也者, 反本, 脩古, 不亡其初者也)”라고 여겼다. 살아있는 후손들이 제사를 올리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올해는 배가 참 달아요. 많이 드세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옮겨간” 것일 뿐이며 산 사람과 끊임없이 소통, 교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제례가 이루어지는 종묘는 길이다. 돌아가신 조상을 만나러 가는 ‘길’인 것이다.
III . 종묘는 빛이다. 빛은 필연적으로 어둠을 수반한다. 1395년 처음 창건 당시 종묘 정전은 신실(神室) 7칸, 공신당(功臣堂)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東門) 3칸, 서문(西門) 1칸으로 지어졌다. 이후 1608년, 1726년, 1836년의 중건과 증축을 거쳐 오늘날의 19실(室) 규모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를 공부하며 끊임없이 왕에 대해 언급하지만 오늘날 (적어도 표면적으로는)전혀 다른 정치체제하에 사는 입장에서 과거의 왕권국가란 참 막연한 것이었다. 허나 정전의 모습을 보니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가능했다. 남문으로 들어가 대면한 정전은 한국의 고건축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한 것이었다.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왕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전 건물 앞쪽으로 펼쳐진 월대(月臺)는 “남북 69m, 동서 109m”의 넓이에 1m 가량 단을 높여 놓아 보는 이를 압도한다. 월대 위에는 단단한 화강암 바위 돌을 넓적하게 떼어내 만든 박석들이 깔려 있었는데, 변변한 기계도 없었을 당시에 이러한 조성이 가능했다는 사실이 놀랍고 가슴 아팠다. 오로지 신앙에 가까운 장인 정신과 신분제 사회 하에서의 숙명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무엇으로 이러한 결과의 동인(動因)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곳에 부묘된 왕의 이름은 기억하면서도 동원된 장인들의 이름은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땡볕 아래서 미미한 연장에 의지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화강암 바위 돌을 떼어냈을 그 장인들의 각고의 노력과 고단함과 서글픔이 월대를 디딜 때마다 박석 한 편 한 편에서 스며 나오는 것만 같은 곳, 왕들은 그런 곳에 모셔져 있다. 빛이 빛으로 변별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어둠이 있어야 한다. “王”이라는 한자 자체가 품고 있듯 “하늘과 땅과 인간을 德으로 관통하는 존재”인 왕이 빛나는 존재로 군림하고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어둠 속에 묻혀버린 민중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빛이 환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이다. 화강암 월대는 오후 2시쯤 되니 난반사를 하는 거울처럼 눈이 부셨다. 한낮, 제왕의 빛나는 기념비 앞에서 깊은 어둠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IV . 에필로그 #1. 종묘 안내판 앞에서 나들이 나온 듯한 중년부인들을 보았다. 공들여 단장한 그 아주머니들의 이런저런 대화가 들렸다. “내가 루브르는 몇 번 가봤는데 여기는 처음 와봐.” “나도 그래. 고궁박물원도 갔다 왔는데 여긴 처음이야.” #2. 정전 남문에서 정전 건물을 바라보며 서있을 때였다. 안내인을 따라 다니며 설명을 듣는 일행들이 다가왔다. 안내인의 이런저런 설명에도 별 반응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안내인이 “이곳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구요, 종묘제례악과 제례가 따로 무형유산의 걸작으로 ‘뽑혔’습니다.”라고 하니 그제서야 여기저기서 “오호~”, “아하~”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종묘는 한국인에게 루브르나 고궁박물원보다는 분명 가깝고 비용은 비교할 수 없이 적게 드는 곳이다. 그럼에도 늘 지나쳐지는 곳일 뿐 본래의 의미를 기억해주는 이는 많지 않다. 그나마 종묘를 찾아온 사람들은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데 대해 감동한다. 종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 전에도 종묘였다. 왜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해 서구인들(혹은 일본인들)이 좋아해 준 다음에야 안심하고 좋아하는가? 중학교 때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처음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이해되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때에야 비로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종묘 역시 그런 것 같다. 1992년, 처음 종묘에 갔을 땐 이해되는 것이 별로 없었다. 당시 종묘는 서울 시내 여느 명소와는 달리 유난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계신 모습이 인상적인 곳이었다. 어린 처녀아이에게 그 광경은 참 ‘희한한’ 것이었다. 그 나이 때는 대개 그렇다. 자신도 저 노인들처럼 늙게 되리라는 것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늙는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추상적인 어휘일 뿐인 시절이었다. 그러나 10여년이 지나 다시 가 본 종묘는 (감히 말하자면) 그 지나온 세월의 폭만큼 이해할 수 있었다. 섬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야 하듯, 종묘의 진면목을 마음깊이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바다를 건너야 했나 보다. 그래서 내게 또 하나의 섬이 되는 곳-종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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