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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상 시인을 추억하며(글/한경희-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이산저산구름 2019. 4. 24. 15:45


정영상 시인을 추억하며(글/한경희-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1.
희미한 건 옛사랑만이 아니다. ‘옛’과 합성되는 모든 언어의 오래된 시간을 어찌 진경으로 되돌릴 수 있으리. 버거운 일이지만 버거운 그대로 버텨 보려 한다. 정영상 시인을 떠올리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돌아간 사람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남긴 행적은 구구한 글로 덧붙일 성격이 아니라서 그렇다. 몇몇 분의 인터뷰를 통해 예술혼을 다 태우고 간 사람이야기를 풀어 놓으려 한다. 온몸을, 온 마음을 완전 연소시켜낸 사람을 말한다는 건 분명 무리한 일이다. 


포항 오천읍을 고향으로 둔 사람의 안동과의 인연은 교직에 몸담은 첫 발령에서 비롯했다. 안동중학교와의 인연이 안동 삶의 시작이었다. 안동중학교 앞 도원교회 뒤편 마을에서 하숙 생활을 하면서 짧다면 짧은 안동인연이 만들어졌다. 높고 훤칠한 키에 뽀얗고 고운 미소년의 얼굴이었던 한 예술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을 두고 풀어내는 이야기는 여러 갈래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새로 길을 내기도 하고 토끼가 낸 길을 가기도 하고 길이 열린 듯 하다가 끊기기도 하고 더러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흩어진 길의 가닥을 묶는 일을 포기하고 아예 그냥 흩어지듯 쏟아놓은 듯 그렇게 또 길을 나서본다.


1992년에 전우익 선생을 만나 대화를 나눈 글을 보면 정영상 시인의 마음자리가 훤히 내다보인다. 질문을 던져서 불편할 내용은 짐작으로 미루며 헤아렸던 것인데. 보호감호소에 30년 이상 갇혀 지내다 풀려나 자살한 사람 이야기나 빨치산 관련 이야기가 가장 궁금했을 터이나 정작 전우익 선생에게는 그 어느 질문도 하나 던지지 않고 혼자 정리하며 묵묵히 이야기를 마무리한 면모를 볼 수 있다. 정영상 시인 말대로 “시시콜콜 무엇을 더 여쭈랴”, 이렇게 사람 마음 헤아리는 걸 무지 잘했을 시인이다. 당시 안동에 머물 때 문학청년들에게 술을 사주며 독려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단지 문학청년만 그랬을 리가 없다. 영향을 끼친다는 말의 의미처럼 은혜가 미치고 입혀지고 후세까지 남아있는 것들, 그래서 시인 정영상을 두고 만감을 꺼내드는 것 같다. 




2.
정영상 시인은 어느 정도 극한까지 이른 낭만주의자였을까를 생각해본다. 혁명가의식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낭만성을 우리는 안다. 낭만과 혁명? 이 둘이 어울리는 조화는 아마도 평범한 우리가 말하는 단어, 극단의 지점에서 자기를 완전히 던지는 일,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배반하지 않고 살아내는 사람들. 특히 이 낭만의 뿌리에 매달린 주벽에서 정영상 시인은 특별나다. 사춘기 때부터 문학 활동을 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 소주 한 병을 숨도 쉬지 않고 비우고 인사불성이 되면서 생긴 버릇이라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주벽으로 20대 문학청년시절을 관통했으며 인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것이다.


그 낭만의 뿌리는 찾아가기가 버겁다. 대신에 공주사대 시절 문예반 흔적을 담아둔 신현수 시인의 시를 통해 대신하기로 한다. 대체로 예술의 낭만성을 다룰 때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술’이다. 요즘처럼 술이 얼큰해지면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앉던 문화가 없었다. 60-70년대 혹은 80년대 중반 정도까지 대학생들의 문화에서 통기타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기타 반주의 노래는 낭만의 중요한 코드가 되었으며 시적인 노래가 많이 불렸다. 이런 대학문화 울타리에서 좀더 낭만성이 짙은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데 그치지 않고 술을 인생 삼아 마셨다. 이 범주에 드는 사람 중에 시인 정영상도 한 자리에 놓인다.
또 하나, 시대의 아픔이 더욱 사람들을 낭만적으로 몰아간 점이 있다. 그것이 술이든 혹은 낭만이든 취하지 않고 살 수 없었던 엄혹한 시대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몹시 가난하고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이어서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웠고 힘들었던 시절의 술과 음악과 시와 또 다른 예술은 단순히 대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실존의 무게를 나누거나 탈출구로서 낭만이었다. 아마도 정영상 시인을 두고 술에 관한 이야기는 제법 많이 있을 것이다. 일단, 술을 즐겨 마셨다는 것이고, 술과 내기에서 항상 이기지 못하면서도 늘 절단 내듯 마시면서 삶의 진정성을 술을 통해서도 찾아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신현수 시인은 “철저한 낭만주의자, 엄살 부리지 않는 낭만주의자”가 보고 싶다고 「정영상」이란 장문의 시를 썼다. 공주사대시절 문예반의 흔적을 알게 하는 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아래 전문을 옮겨왔다.


학교 때 우리는 낭만주의자였다.
등교길에 다른 낭만주의자를 만나면
우리는 강의실이 아니라 학교 앞 개미집이나 동그라미집으로 들어갔고
이미 먼저 들어와 술을 마시고 있는 낭만주의자들도 있었다.
취한 채 강의실에 들어가 교수와 시비를 붙거나
지금은 없어진 상록원에 앉아 하염없이 금강을 내려다보다가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면
금강의 흰 모래가 너무 눈이 부셔 철철 우는 낭만주의자들도 있었다.
시목동 뒤편 어부집에 가서 어부 아저씨의 배에 올라가
막걸리를 먹고 또 먹다가 속에서 쓴 물이 나을 때까지 토한 후
벌거벗고 금강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죽으려고 작정하고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정말 물에 빠져 죽을 뻔한 낭만주의자들도 있었다.
공주에서 우리는 퇴폐적 낭만주의자였다.
학교 앞 삼거리에서 술 먹고 땅바닥에 누워 있으면
그를 아는 다른 낭만주의자가 자취방으로 떠메고 갔고
늦은 오후 학교를 마치고 공주 읍내로 들어가는
금강 둑길 위를 걷는 낭만주의자들의 발걸음은
강물에 비친 철교와 백사장과 노을에 취해 늘 휘청거렸다.


봄이 되면 벚꽃 흐드러진 공주산성에 올라가
술잔 위에 꽃잎을 띄워 놓고 술을 마셨다.
가끔 4·19 기념탑이나 우금치의 동학 혁명 기념비를 구경하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뜻은 없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선생이 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낭만적으로 가르쳤으나
아이들의 현실은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았다.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 죽어갈 때
우리들의 낭만주의로는 더 이상 아이들을 지켜낼 수 없어
우리들은 하나 둘 현실주의자가 되기 시작하였다.
낭만주의에서 현실주의로 넘어가는 길은 참 멀고 험했다.
그렇다고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다고 대부분 생각하였으나
지독한 퇴폐적 낭만주의자였던 한 친구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된 후
그의 현실주의를 위하여 끝내 목숨을 바쳤다.
그가 죽고 나서야 현실주의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았다.
   - 詩 「정영상」. 신현수 시인이 정영상 시인을 그리며 쓴 시다.


떠나간 문우이자 시인을 기리는 글 막바지에 이르면 비장함이 가득하다. 공주사대를 주 무대로 선술집으로 몰려다녔던 문청들은 금강이 보이는 언덕에서 봄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대낮에도 취해 살았다. 그렇게 시를 살아가던 문우들이 졸업을 하면서 교사가 되고 낭만은 말라가기 시작한다. 학교에는 비민주적인 현실이 있었고 그 부당성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다 교직에서 쫓겨났다. 많은 해직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정영상 역시 학교와 아이들을 그리워하다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만다. 이 아픈 현실을 두고 신현수 시인은 ‘현실주의는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라는 말로 추모의 정을 대신한다.


조재도 시인은 「봄비」에서 그리운 정영상을 부른다. 이 글을 보면 마음이 그리 짠할 수 없다. “오래 전에 죽은/시인 정영상/슬픈 눈/큰 키 /생각나네 진저리치며 내려놓던 /소주잔 /그가 부른 노래, 망향/망향이라는 노래 /염소가 울던 /금강, 빗속을 거닐며 불렀던 /노래” 생전의 시인 정영상이 즐겨 마셨던 술이 ‘진저리치며 내려놓을’ 생존의 무게였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술잔에 담았을 쓸쓸한 삶의 구석들이 함께 아픔을 나눈 문우를 통해 전달된다. 교육문예창작회를 같이했던 문우의 포착은 놀랍다. 그리움과 미움이 크게 요동칠 때마다 마음이 한점씩 깎여나갔을 아린 술잔,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여 들고 살다 죽음까지 이른 시인의 진저리쳐지는 삶을 떠올려 본다.




3.
너나할 것 없이 가난하던 시절에는 밥을 배불리 먹지 못했다. 그렇다고 유년이 그저 배고프고 고달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아이들은 놀랍게도 놀이와 먹을거리를 일치시켰다. 가을이면 풍성한 들판으로 나가 밥을 대신할 것을 충분히 찾았고 이에 얽힌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리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를 정영상 시인도 간직하고 있었다. 더구나 연일 정씨 집성촌 마을이니 크게 눈치 볼 일 없이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 동네 산도 문중산이라 들판에 익은 갖가지 탐나는 과일은 아이들 몫으로 돌아갔다.


참감나무에 열리는 감은 제사용으로 특별한 관리대상이지만 어머니 눈을 피해 따먹던 일이나, 밤을 먹기 위해 고무신을 신고 밤을 까다 가시에 찔린 이야기는 즐겁다. 특히 밤 껍질을 까기 위해 대나무로 창을 만들어 칼처럼 사용한 것이나, 살구는 먹고 살구씨로 공기놀이를 하고, 또 찐빵이 먹고 싶어 살구와 바꿔 먹은 이야기도 흥겹다. 구슬치기에서 맨날 잃고 구슬빚까지 지자, 어머니 몰래 닭 알을 꺼내 가져가다 깨트린 이야기는 유쾌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구슬빚 갚는 일은 얻어맞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가장 맛있는 살구나무가 있는 친구의 비위를 잘 맞춰야 했고, 예쁜 여자아이를 두고 경쟁적으로 좋아하기도 한 귀여운 어린 시절이 그려진다.


망개나무 열매는 먹고 씨는 실에 꿰어 목걸이, 염주, 팔걸이(팔찌)를 만들었다. 또 소나무 속껍질을 벗기고 송기(松肌), 솔밥(어린 솔방울), 솔순 등도 먹었다. 겨울이면 먹을 게 별로 없으니 아버지가 땅에 묻어둔 밤을 몰래 꺼내 먹거나, 쥐똥나무로 새총을 만들고, 대나무로 활을 만들고 닥나무로 활줄을 만들어 한번도 잡지 못한 참새, 토끼잡이를 나서기도 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볏짚으로 새끼를 꼬는데 그렇게 하기 싫어했던 것이며, 부모님이 한밤까지 새끼로 가마니를 짜는 소리가 마음 아팠다는 추억이며, 추운 겨울이면 곡식이 든 가마니에 들어와 새끼치고 사는 쥐들이 있었고 어른들은 그 쥐를 낫으로 죽이기도 했던 유년이 있었다. 또, 호박벌을 잡아 꿀을 빼먹던 이야기, 노루 사냥을 구경하면서 노루의 목숨과 노루고기를 두고 이중적인 생각을 했던 것 등이 유년의 기록에 남아 있다.


시대의 가난에 불우했던 유년이지만 배고픈 환경에서 먹을 걸 찾아내는 놀이를 쉼 없이 지속하던 아이들은 그야말로 생명성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이었다. 배가 고파 주눅 들거나 힘없이 늘어진 아이는 보이지 않고 끼리끼리 모여 그날의 먹을 것을 향해 함께 움직이고 나눠먹고 그러다 다투고 다음날 다시 만나 먹을 것을 함께 찾아내는 아이들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 마음의 바탕에서 시도 있고 예술도 있었지 않았을까. 정영상 시인이 말한 대로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나뭇잎과 햇살, 아침과 저녁, 밤과 낮에 대해 투시하는 고뇌 없이 대뜸 문학을 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걱정스러운 것인가.  


어린 시절 고향풍경과 일상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이 바로 「유년」이다. 아마도 다 자란 콩나무의 키쯤 되었을 시절 어렴풋한 기억의 한 장면이 아닐까 싶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다락논밭에 엎드려 일을 했을 것이고 당시 어린 꼬마들도 어느 집에서나 심부름으로 자기 몫의 할 일이 있었다. “다 큰 콩 키만할 때까지도/나는 팬티라는 것을 몰랐다/국민학교 입학할 때도/팬티라는 것을 입어보지 못했다/그저 아버지나 형이 입던 바지를/가랭이만 끊어내고 입거나/조그만 고추를 달랑거리며/미루나무 늘어선 고개 너머 콩밭까지/물 주전자 술 주전자 심부름을 했다” 대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 술 심부름을 다니다 만나는 뱀은 위협적이거나 보기 불편한 불청객이었고 그러면 끝말잇기를 하면서 그 겁나는 길을 지나다녔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많은 사람들의 추억 중에 물려받아 입던 옷이 있었을 거다. 새 옷 사 입을 형편이 안 되는 집에서는 언제나 형의 옷을 받아 입었는데 정영상 시인의 유년 풍경에도 나타난다. 헌옷만 입었던 사람들에게 살뜰했을 옷, 특히 교복은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리라 본다. “형이 물려준 중학생복 저고리(단추가 두 개밖에 달리지 않은)/우리 면 소재에서 그래도 귀했던/저고리를 입고/봇물이 많던 날/미꾸라지 잡으러 가던/열한 살 소년이 되어본다”(「잠을 잘 수가 없는 날은」)




4.
아름다운 10대와 입시의 문제는 지속되는 교육현실이자 교육문제이다. 여전히 문제적인 교육구조에서 벗어나지는 않거나 못한다는 것이다. 전교학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공부벌레가 되라’고 교장은 선창을 하고 700여명 학생들은 복창을 했던 그 시절, 수학여행 가서도 자율학습하기, 매월 성적우수자, 성적우수반 시상하기 등의 교육환경이 극복되었는가는 의문이다. 교육이란 공적 문제가 개인영역으로 변화되면서 사교육으로 더욱 악화된 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국조례시간에 차렷 자세를 제대로 못했다고 교장 선생님 앞으로 불려나와 귀싸대기를 맞았던 아이들의 숫자는 좀 줄었지 싶다. 교권이 땅에 떨어지면서 무도한 교사의 자리가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복주여중 교사 시절 교육현장을 담은 작품에는 가슴 아픈 절절한 교육현실이 등장한다. 집안이 가난해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를 퇴학 처분해야 했던 일, 시험성적이 나빠서 바보가 되어야했던 아이 이야기는 어제의 일만이 아닐 것이다. 교육의 중요성은 기회부여의 균등성인데 교육 자체가 차단된 아이들은 어떻게 사회에 진출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심각한 사회 불균형을 만들고 있다. 이런 문제적 현실을 생각할 때 교육시는 분명 운동의 차원이 필요했고 변화라는 중요한 목적을 가진 글이어야 했다. 정영상의 첫 시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의 호소력은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시험 점수나 등수 때문에/자신이 바보라는 걸 깨닫게 된 건/정말 처음이라던 혜영이 (중략)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피맺힌 유서 남겨 놓고 목숨 끊은/어린 열다섯 여학생의 얼굴이 떠오르고/이 나라 푸른 하늘 보기가/그만 소름 끼치도록 무서워진다.’ (「아이들 다 돌아간 후」)


해직되고 아이들과 학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한 「환청」이란 시가 있다. 죽령재 너머 단양 시인의 집에까지 들리는 안동 복주여중의 수돗물 흐르는 소리에서 먹먹한 감이 든다. 그리움이 깊어 헛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그리움이 짙어지자 마음이 내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인은 마음과 몸이 병들지 않았을까 싶다.


체육 시간이라 급한 김에 그만 누가 수도 꼭지 잠그는 걸
잊어버리고 뛰어 나갔을까 안동 복주 여중에서 수돗물
떨어지는 소리 죽령 너머 단양의 내 방에까지 들려온다.
                                                                               -「환청」


해직교사들은 복직투쟁을 다양하게 전개했는데 출근투쟁이란 것이 있었다. 학교로 가게 되면 막아서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입씨름, 몸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학교를 훔쳐보러 간다」는 시에서도 도둑이 될지라도 학교를 훔쳐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보인다. ‘전교조 해직교사’는 무서운 사람인 시절에서 “짜장면집에서라도 좋다/너희들 불러모아 놓고/수업 한 시간 하고 싶다/이렇게 편지를 써 보냈더니/내 편지는 수상하다고/수상한 것은 빨갛다고 되돌아오는데/십자가는 왜 저렇게 많은가” 「내 편지는 빨갛다고 돌아오는데」
학교가 몹시도 그립고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데 현실장벽은 너무나 높고 부당하게 해직당한 마음을 위로 받을 곳도 없는 안타까움이 잘 드러난다. “학교가 보일까 봐/학교가 보이지 않는 골목길로 돌아간다/그래도 보이면/고개 숙이고 간다/그래도 보이면/‘난 학교 같은 거 안본다’/속으로 빽 소리치며/자전거 패달을 전속력으로 밟는다” (「자전거 패달을 전속력으로 밟는다」)


80년대 안동풍경 중 하나, 정영상 시인에게 포착된 것은 김만철 가족의 소지품 전시회와 목성동 성당의 집회와 데모이다. 청진의과대학병원 의사였던 김만철 씨는 일가족 11명을 데리고 탈북했는데 그들이 입었던 속옷, 양말까지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했던 시절이다. 그때 시청 지하실 전시장에서 전시회가 열렸고 안동시 초,중,고 학생들은 단체로 전시회를 관람했다. 또, 목성동 성당에서 농민회의 농성을 저지하는 전경과 체루가스의 시절을 담고 있다. 1986년 9월3일 저녁미사가 있는 수요일 성당에서 농성하다 거리로 쫓겨나고 목성동 성당에는 전경들이 가득 찬 그때, 안동의 민주화가 진행되던 역사의 한 장면을 담았다.
교구청 담장가에/말 못하는 해바라기들은/며칠째 어둠에 묻혀 농성하는/카톨릭 농민회와 학생들의/기도 소리를 아는지/사람보다 더 거룩히 고개 숙이고/찢어져 어디론가 사라져버린/성고문 폭로 대회 현수막 펄럭이는 소리/가슴 울리며 들리는 오늘은/1986년 9월3일 수요일인가/저녁미사를 보러 온 하느님마저/최루탄 까스에 눈물을 흘리며/거리로 거리로 쫓겨나고/안동시 목성동 성당 입구엔/하낫둘 하낫둘 군화발 소리만/요란하구나 (「목성동의 9월」)




5.
정영상추모사업회에서 10주년 때(2003.4.12) 공주사대 교정에 정영상 시비를 세웠다. 「돌 앞에 앉아」라는 시 말고 또 다른 글을 보면 “그는 물같은 사람이고 동시에 불같은 사람이었다. 가슴속에는 늘 출렁출렁 감정의 물결을 담고 있다가 누가 장난으로 돌팔매질 하나라도 하면 불같이 일어나 사랑하고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새겨져 있다. 시인 정영상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의 글이다. 유고시집 제목도 물, 불, 바람이 들어간 걸로 보나 뜨겁게 사랑하고 미워할 줄 알았던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길지 않은 안동체류, 시인과 인연 있었을 현장이란 술을 많이 나눴을 대석식당, 첫 발령지 안동중 그리고 하숙집, 해직을 당한 복주여중, 목성동 성당으로 돌아봤다. 식당 대신에 대석다방도 보이고 대석길 표지판도 보인다. 안동중 입구 도원교회 뒤 동네는 언덕이나 산을 올라야 한 눈에 들어올텐데 2층 주택들이 키를 맞춰 나란하다. 그리고 복주여중 빈 운동장을 돌며 수돗물 소리를 떠올려 보고, 새로 지은 목성동 성당을 올라봤다. 소박한대로 이 무대를 배경삼아 정영상 시인의 흔적을 느껴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공주사대 시비 사진과 자료에 도움을 주신 조영옥, 배용한, 김헌택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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