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 남해 금산 ■, ■ 담양 소쇄원 ■,

이산저산구름 2016. 2. 23. 06:46


남해 금산 ■


 

 

지정번호 명승 제39호
소 재 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상주리 산257-3 외
지정면적 559,782㎡
지 정 일 2008년 5월 2일


남해 금산은 높이 681m로서 섬에 위치한 산으로는 높은 산이라 할 수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기암괴석들로 뒤덮여 있으며, 주봉인 망대를 중심으로 왼쪽에 문장봉·대장봉·형사암, 오른쪽에 삼불암·천구암 등의 바위산이 솟아 있다. 금산에서는 기암괴석의 절경과 남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어 전망도 장쾌하다.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비롯하여, 삼사기단三師祈壇·쌍룡문·문장암·사자암·촛대봉·향로봉·음성굴 등 금산 38경을 이루는 천태만상의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 그리고 눈 아래로 보이는 바다와의 절묘한 조화는 명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산 정상에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함께 한국 3대 기도처의 하나이자 쌍계사의 말사인 보리암이 있고 그 밑에는 1977년에 해수관음보살상이 바다를 향해 세워졌다. 금산의 절경 38경 중에서 쌍홍문·사선대·상사암·암불암 등이 대표적인 명소다. 쌍홍문은 여인의 눈동자 같기도 하고, 두개골에 두 눈이 뚫린 것 같기도 하며, 쌍 굴로서 높이는 7~8m 정도이다. 굴이 둥근 모양이어서‘한 쌍의 무지개’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굴 속에 들어가 뒤로 돌아보면 다도해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상주해수욕장의 쪽빛 바다에 크고 작은 섬들이 그림처럼 떠 있는 모습이 펼쳐진다. 남해 금산은 다도해에서 유일하게 큰 체적의 화강암 산임에도 불구하고 토산 성격이 강해 남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낙엽수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면 마치 오색 자수판을 보는 듯하며 대규모의 낙엽수림이 화강암의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아낸다.

 

 


남해 금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산의 하나로 알려져 수십 편의 금산유람록이 전해진다. 특히 영남에서는 합천의 가야산, 지리산과 겨루며 중국의 남악南嶽에 비교되기도 했다. 바다 속의 신비한 명산으로‘소금강산’혹은‘작은 봉래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683년(신문왕 3) 원효대사가 이곳에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하여 원래 이름은 보광사였고 산 이름도 보광산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서 100일 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였다고 하여 그 영험에 보답하는 뜻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었다 해서 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왕업을 성취한 은혜를 갚기 위해 이름을 비단‘금錦’자로 바꾸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나라에서 편찬한 지리지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없고, 다만 선인들의 유람록에서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 지리지를 비롯하여 그 이후의 모든 지리지에 금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금산이란 이름은 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면서 부쳐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이 밖에도 신라 고승인 원효대사·의상대사·윤필거사 등이 이곳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을 왔다갔다는 서불의 이야기가 담긴‘서불과 차암徐市過此岩’과 춘·추분 때만 볼 수 있다는 노인성老人星(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과 관련된 전설 등 신비스런 전설이 많은 곳이며, 전국의 3대 기도도량인 보리암이 위치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많은 명승지이다. 남해 금산에는 고려 명종 때 설치된 것이라고 전해지는 남해금산 봉수대가 있다. 비교적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둘레는 26m의 네모난 형태이며, 높이는 4.5m이다. 당시 전국의 봉수경로 5개 가운데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경로에 속한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어 봉화의 출발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담양 소쇄원

 

 

지정번호 명승 제40호
소 재 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외
지정면적 4,060㎡(지정구역), 118,866㎡(보호구역)
지 정 일 2008년 5월 2일(사적에서 재분류/사적 제304호 1983.7.15)


양산보梁山甫(1503~1557)의 호, 소쇄옹瀟灑翁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소쇄원은 양산보가 은둔생활을 하던 1520년부터 1557년의 기간에 조성된 조선시대 선비의 별서정원이다. 소쇄원은 내원과 외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원의 요소로는 입구공간·대봉대공간·계류공간·화계·광풍각·제월당·담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체적 내용으로는 다음과 같다. 소쇄원은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계류가 암반을 타고 오곡으로 흐르다가 폭포로 떨어져 작은 소담을 이루는 3천여 평의 공간에 조성되어 있다. 소쇄원의 구성으로는 계류를 중심으로 양쪽 언덕 임간에 터를 잡아 광풍각光風閣·제월당齊月堂·초정·화계·연지·석천 등이 배치되고 물레방아와 석가산도 있었다.
계류 위에는 외나무 다리와 죽교가 설치되고 정원의 구역은 아름다운 토석담으로 구획 지워져 있다. 담벽에는 「애양단愛陽壇」·「오곡문五曲門」·「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慮」의 글씨가 석판과 목판에 새겨져 박혀 있어 운치를 더한다. 정원의 입구는 울창한 대숲으로 외부와 차폐되어 있으며 정원 식물은 대나무·매화·소나무·살구나무·느티나무·복숭아·벽오동·버드나무·배롱나무·단풍나무·사계화·치자나무·국화·연꽃·순채 파초를 심었다. 이러한 식물은 선비들이 좋아 하였던 화목들이다. 지금도 넓은 소나무와 느티나무 배롱나무의 원림이 계류, 정자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연지는 방형인데 하나는 2.5m의 정방형이며 하나는 세로 5.5m, 가로 4m의 장방형이다. 이들 연못에는 계류의 물을 나무 홈대로 연결하여 넣고 있다. 소쇄원의 외원은 관덕사·오암정·지석리·바리봉·황금정·창암동·옹정봉·고암동·장자담·죽림사·산리동·석구천·통사곡·영지동·할미봉·장목등·한벽산 등으로 소쇄원의 외원 요소는 소쇄원의 담장 밖 인근의 요소로부터 동쪽·북쪽·남쪽의 원경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

 


주자가 중국 숭안현 무이산 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에 무이정사를 짓고 현실을 벗어나 은둔하였던 은일사상이 소쇄원의 조성배경을 이루고 있다. 소쇄원에는 김인후金麟厚가 1548년(명종 3)에 지은 오언절구의 48영詠이 남아 있다. 또한 고경명高敬命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을 유락하면서 4월 23일 소쇄원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 있다. 또한 소쇄원의 배치를 목판으로 새긴「소쇄원도」가 남아 있다. 이 소쇄원도는 가로가 35cm, 세로가 25cm로 제작되었는데,「 1775년 4월 하순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삼을해년청화三乙亥年淸和하완간下浣刊」에 제작했다는 판각기가 새겨 있어 소쇄원의 원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소쇄원도에는 위쪽에 김인후의「소쇄원 48제영題詠」이 새겨 있고, 오른쪽 가장자리에는‘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대봉대 옹정봉 황금정 유 우암선생필(蒼巖村 鼓巖洞 瀟灑園 齊月堂 光風閣 五曲門 愛陽壇 待鳳臺 瓮井峰 黃金亭 有 尤菴先生筆)’이라 새겨 있다.


‘우암尤庵’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호다. 이 소쇄원도에는 건물의 명칭·식물의 명칭·지당·계류의 조담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구 담벽에는 원래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이 편액으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쇄원은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문아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별서정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