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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역사 4 - 스페인어, 표준화로 세계화를 꾀하다

이산저산구름 2014. 6. 11. 13:39

말의 역사 4 세계어로서의 스페인어 2 스페인어, 표준화로 세계화를 꾀하다
 

전 세계 5대륙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스페인어는 각 지역의 토착어의 영향과 다양한 언어적ㆍ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변이형으로 발달하게 된다. 그러나 사용 지역의 방대함을 고려할 때에 스페인어는 언어 표준화가 아주 잘 이루어진 사례로 꼽힌다. 즉, 스페인어는 사용 지역에 따른 지역적 변이가 영어, 중국어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는 다른 언어에 비하여 현저하게 적다는 특징이 있다. 이렇듯 스페인어가 세계어로서 언어 표준화를 잘 유지해 온 배경으로는 스페인 왕립 학술원Real Academia Española, RAE 및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Asociación de Academias de la lengua española, ASALE의 지속적인 언어 표준화 노력을 꼽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와 스페인 왕립 학술원이 어떻게 긴밀한 협조 체계를 이루어 스페인어 표준화 및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와 언어의 표준화와 관련하여 스페인어 사용 국가들 간에 어떤 다양한 논의가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스페인 왕립 학술원의
언어 표준화 노력


스페인 왕립 학술원은 1713년 설립된 국왕 직속 기관으로 스페인어 표준화 작업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스페인 왕립 학술원은 다양한 스페인어 변이형을 수용하면서 스페인어의 표준화 정책을 주도하였는데, 왕립 학술원의 여러 사업 중 스페인어 표준화 노력의 일환으로 시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코퍼스 구축, 규범 문법 기술, 규범 사전의 편찬, 문자 규범 출간 등을 들 수 있다.
 
스페인 왕립 학술원에서 주도하는 코퍼스 구축 사업으로는 1억 6천만 어절 규모의 현대 스페인어 참조 코퍼스CREA, Corpus de Referencia del Español Actual와 2억 5천만 어절 규모의 스페인어 역사 코퍼스CORDE, Corpus Diacrónico del Español를 들 수 있다. 1997년부터 시작된 코퍼스 구축 사업은 최근 21세기 현대 스페인어 코퍼스CORPES XXI, 스페인어 역사 사전 코퍼스CDH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CREA의 경우 1975년부터 2004년까지 다양한 장르 및 스페인어 사용 지역의 스페인어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다양한 스페인어의 사회적, 지역적 변이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 CORDES는 2억 5천만 어절 규모로 스페인어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1975년까지 언어의 변천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스페인어 역사 데이터베이스이다.
 
대표적 스페인어 규범 문법으로는 1771년 초판을 시작으로 2010년까지 수십 차례의 개정을 거친 《왕립 학술원 스페인어 새 문법Nueva Gramática de la lengua castellana》을 들 수 있으며, 대표적인 규범 사전으로는 《왕립 학술원 스페인어 사전Diccionario de Real Academia española; DRAE》을 들 수 있다. 또한 1741년을 시작으로 수차례 개정안을 거쳐 가장 최근에 2014년 개정안 발표를 앞두고 있는 《스페인어 문자 규범Ortografía española; OE》 등도 대표적 사업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어 학술원 사진
 




2.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와의 협조


스페인 왕립 학술원은 스페인어권 국가의 학술원들과 매우 긴밀한 협조 체제를 이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기관으로는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를 들 수 있는데,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는 1951년 설립된 기관으로 미국, 필리핀, 라틴아메리카를 포함한 전 세계 스페인어권 학술원의 연합 기관이다. 스페인 왕립 학술원과 협력 체계를 이루어 《스페인어 문법》2001, 《스페인어 문자 규범》1999, 2010, 《범스페인어권 사전》2005 등의 출간에 공동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스페인어 표준화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스페인어 문자 규범》1999, 2010 출간과 관련하여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진다. 《스페인어 문자 규범》 출간의 주체는 스페인 왕립 학술원이었으나, 실질적으로 문자 표기 규범의 구체적인 안을 만든 것은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였다. 특히 《스페인어 문자 규범》1999은 스페인이 아닌 신대륙에서 먼저 출간되었으며, 출간 기념 행사는 상징적으로 중남미를 대표하는 문법학자인 안드레스 베요Andrés Bello, 1781-1865의 이름을 딴 칠레 대학의 ‘카사 데 베요Casa de Bello’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3. 스페인어의 문자 표기 규범과
언어 표준화 노력


실제로 《스페인어 문자 규범》이 최초로 출간된 것은 1741년이었으며, 그 후로 지속적으로 스페인어 문자 규범이 수정되고 보완되어 오늘날의 스페인어 문자 규범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2010년 《스페인어 문자 규범》의 대원칙은 ‘범스페인어권 포용 원칙’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스페인어 사용권을 포용할 수 있는 언어 규범 및 문자 규범을 제정하고 공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스페인어권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일관성 있고, 체계적ㆍ총괄적이며, 단순하고 교육적인 문자 규범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어 문자 규범》 문자 표기의 가장 우선적인 원칙은 ‘음소와 문자의 규칙적인 대응’이다. 실제로 스페인어는 문자와 발음이 매우 규칙적으로 대응하는 언어로 꼽힌다. 그러나 문자 표기 규범의 설정 및 수정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논의 중의 하나는 다양한 스페인어의 방언에 존재하는 발음의 변이형을 하나의 문자 표기 규범으로 모두 충실하게 반영하기는 무척 어렵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초기의 문자 규범은 작가, 교육계 등 사회의 모든 계층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신대륙의 대표적 학술 기관들로부터의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중 중남미를 대표하는 문법학자인 안드레스 베요는 1823년 《칠레 문자 규범ortografía chilena》을 제안하면서 스페인어 문자 규범에서 중남미에서 실질적으로 사용되는 스페인어 발음이 반영되어야 함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스페인어 문자 규범은 19, 20세기를 거치면서 스페인어 사용 국가들에서 정부의 시행령 발효와 이를 따르는 교육계의 협조와 함께 매우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문자 규범은 스페인어 사용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간주된다. 스페인어와 같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에서 문자 규범은 다양한 변이형이 존재함에도 스페인어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스페인어는 사용 지역에 따라서 음성, 음운, 어휘, 형태, 통사적으로 다양한 변이형이 허용되지만 대부분의 스페인어권 국가들의 문자 규범은 이러한 모든 변이형을 넘어서 존재하는 가장 통일성 있는 부호라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음소 /ʎ/, /ɵ/, /y/는 사용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음소의 변이형이 존재한다. 특히 음소 /ɵ/의 경우, 스페인에서는 치간음으로 발음되나 중남미에서는 치경음 /s/로 발음되어 독자적 음소 및 문자로 존재하는 /s/와의 변별력이 없다. 그럼에도 스페인어 문자 표기 규칙에 따라 모든 지역에서 일관성 있는 표기c, z를 함으로써, 스페인어의 단일성을 유지해 주도록 하였다. 이러한 문자 규범의 통일은 스페인어 사용자들에게 단일한 언어 사용 공동체라는 의식을 일깨워준다.

 




4. 언어 표준화 사업에
대한 수용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어권 학술원을 주축으로 구성된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는 《스페인어 문자 규범》 제정 및 개정, 왕립 학술원 규범 문법 출간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방대한 스페인어 사용 지역의 다양한 변이형을 왕립 학술원의 규범 문법 및 사전에서 수용하도록 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학술원들의 설립 배경을 보면 대부분 스페인 왕립 학술원의 부속 기관으로 출발하였으며, 현재 스페인 왕립 학술원에 준하는 대등한 기관으로 인정받고 있으나, 실제로 라틴아메리카의 다양한 변이형이 표준 스페인어 문법 및 사전에서 수용되는 과정에서 스페인 왕립 학술원과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 간의 미묘한 갈등과 다양한 줄다리기성 논의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논의 중의 하나가 왕립 학술원 문법, 사전, 문자 표기 규정의 지나치게 규범적인 성격에 관한 것으로, 중남미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왕립 학술원에서 출간하는 문법, 사전, 문자 규범 등은 중남미를 포함한 각 지역의 스페인어의 특징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 포용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이 나오고 있다.
 
최근 ‘아르헨티나 언어 학술원Academia Argentina de Letras, AAL’ 신임 원장인 호세 루이스 모우레José Luis Moure는 스페인 왕립 학술원은 범스페인어권 언어 수용 정책에 대하여 명분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천하는 태도를 보여야 함을 매우 비판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어를 식민지 스페인어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스페인과 대등한 스페인어의 다른 양상으로 보아야 함을 매우 강한 어조로 언급하였다.
 
스페인어권의 지역적 방대함을 고려한다면, 하나의 규범이 이렇게 방대한 지역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하여 신중한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현재까지 스페인어 표준화의 노력은 스페인 왕립 학술원과 스페인어권 학술원 연합회의 협조 체제하에서 하나의 통일된 규범을 만드는 데에 주력을 했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스페인어권 언어 표준화 정책의 과제는 다양한 스페인어의 변이형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정해진 규범을 각 스페인어 사용 지역에 효율적으로 교육하고 보급하는 문제가 될 것으로 본다.   

신자영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언어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스페인 마드리드 아우토노마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강의 교수이다. 대조언어학, 사전학, 코퍼스 언어학 및 스페인어 교육과 관련된 여러 저서 및 논문이 있다. 대표 저서로는 《대조분석론》2003, 대표 논문으로는 〈대조 코퍼스 및 학습자 코퍼스를 이용한 중간 언어 연구 방법론〉, 〈화용, 담화 연구를 위한 스페인어-한국어 병렬 코퍼스 구축 방법론〉, 〈DELE코퍼스 구축 및 등급별 스페인어 기본 어휘 선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