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죽은 단어들의 무덤사전 - '쓰다'의 일곱가지 쓸모 6

이산저산구름 2014. 5. 22. 10:07

 

 죽은 단어들의 무덤사전 ‘쓰다’의 일곱 가지 쓸모

과거엔 흔히 ‘편집증’이라고 불렸던 질환을 현대의 의학 사전에선 망상 장애로 정의한다. 하지만 두 단어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환자나 보호자의 반응은 사뭇 대조적이다. 편집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면, 프로이트가 ‘지적인 정신병’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왠지 지적 활동을 너무 왕성하게 한 나머지 뇌가 정상 상태에서 벗어나면서 생겨난 질환으로 여겨지지만, 만약 망상 장애 환자로 분류한다면, 이는 마치 뇌의 기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여 아무도 살지 않고 흉흉한 소문들만 들끓는 폐허가 뇌 한쪽에 존재하는 것처럼 들린다. 게다가 망상 장애를 앓고 있는 자들은 미국 정신의학회의 진단 기준에 의거하여 일곱 가지 유형으로 나뉘기 때문에, 일단 특정 유형으로 낙인찍혀 분리 수용소에 갇히고 나면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색정형―자신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 정도로 사랑을 받고 있다―이나 피해형―누군가 자신의 성공을 몹시 질투하여 신변을 위협하고 있다―으로 분류된 환자들이나 그들의 보호자들은 진단 결과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고 재검을 요청하거나 차라리 혼재형―서너 가지 유형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이나 불특정형―여섯 가지 유형 이외의 기타 반응을 보인다―으로 분류해 달라며 협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편집증이나 망상 장애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완전히 파괴하진 않기 때문에, 이웃이나 동료들에게 자신의 병명이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하긴 그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깊이 고려하지 않은 채 충동적으로 도장 공방을 독립하게 된 이유 중에는 문자와 책에 대한 자신의 편집증을 스승이나 동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의도도 반영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한때 갖가지 사전들을 함께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연모했던 여자와의 강렬했던 연애 감정을 색정형 망상으로 매몰차게 규정한 정신과 의사의 진단을 수긍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한 연애를 모두 망상으로 간주한다면, 첫사랑의 생채기를 하나쯤 지닌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망상 장애를 극복할 처방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는 결코 그 여자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생겨난 상처에 대해서도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자신의 상처로부터 상대방의 상처로 건너가는 행위에 불과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렵게 이별을 통보한 이상 그 여자를 괴롭혀선 안 된다는 강박 관념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 존재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그는 여자와의 완벽한 이별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복덕방에 도장 공방을 내놓았고 옛 스승과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렇다고 도장 만드는 일을 아예 그만둘 작정은 아니어서 공구함을 처분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도장 사업은 내리막을 걷고 있지만, 이혼율과 자살률이 세계 최대이고 각종 이권을 둘러싼 송사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적어도 그가 죽기 전까지는 도장의 쓸모가 남아 있으리라. 도장 공방을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고 단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도시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도장 공방을 차릴 때까지만이라도, 그는 《도장 사전》을 완성하는 일에 집중할 작정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 여자에게 《도시생활 바깥 사전》이나 《알레르기 사전》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는 자신의 이름이 그녀의 추억을 깨우지 못하도록 가명을 써서 사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도장 공방의 작업대 앞에 앉아 국어사전을 첫 장부터 펼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수요일 오전 열한 시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찾아올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는 의자 하나를 옛 스승의 공방에서 빌려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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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죽은 단어들의 무덤사전 ⑥ 쓰다: 가명을 쓰다' 편이 이어집니다.
 
 

김솔 작가

글_김솔
1973 출생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공동 당선
2013 문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