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단어들의 무덤사전 - '쓰다'의 일곱 가지 쓸모 4
이혼 소송을 성공적으로 마치자마자 여자는 위자료로 받은 자신의 아파트에다 출판사를 차렸다. 그러고는 명확한 이유도 없이 부조리한 상황에 갑작스레 내몰리게 된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을 빠르게 이해하고 손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사전을 만들자고 그에게 제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써서 그의 작업에 필요한 책과 자료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부터 그는 도장공방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채 사전을 만드는 일에 하루를 꼬박 쏟아부었다. 사전의 형식을 빌려 기존에 출간된 책들은 하나같이 작가의 편협한 해석이나 부정확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어서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국어사전이 다루지 않는 단어들은 결코 사용하지 않았고 다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표현 또한 피했다. 《도장 사전》 편집을 중단한 까닭도 낯익은 것들을 다루는 사이에 방심하게 되는 걸 극히 경계했기 때문이다.
여자의 충고가 보태어져 아래와 같은 사전들이 기획되었다.
《주부생활 사전》은 기혼 남녀가 직장에서 갑작스레 해고되었거나 불의의 사고로 인해 퇴직해야 했을 때 실업의 현실을 빠르게 이해하고 주부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동년배 주부들의 지식과 경험, 문화와 유행, 행동 방식과 사고방식, 욕망과 질병 따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우울증이나 희생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은 제외한다.
《휴일 사전》은 밥벌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가장들에게 더 이상 가족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현실을 빠르게 이해시키고 군림하는 대신 존중하는 방식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가족과 함께 머무는 휴일 내내 필요한 야외활동과 음식, 문화 현상, 교육, 첨단 기계와 여행에 관련된 키워드를 제공한다. 대중 매체가 세대를 규정짓기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은 제외한다.
《남녀 사전》은 몸과 영혼의 암수가 일치하지 않던 사람들이 의학의 도움으로 성별을 바꾸게 되었을 때, 유아부터 노인까지 남녀의 차이점을 빠르게 이해시키는 한편 새로운 성적 정체성과 역할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유전적 기질과 문화적 성향, 정치와 사회 제도, 정신분석, 역사, 환경, 산업 등의 범주에 따라 다양한 단어들과 범례를 추가한다. 편견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단어들은 제외한다.
《도시생활 사전》과 《도시생활 바깥 사전》은 질병이나 파산 등의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낯익은 공간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을 때 겪게 될 어려움들을 빠르게 이해시키고 최소한의 시행착오를 통해 새로운 주거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도시생활 사전》에는 건물과 규칙, 생필품, 교통 시설, 세금 등에 대한 설명이 많고, 《도시생활 바깥 사전》에는 동물과 식물, 자연 변화, 농사와 채집, 낚시와 양식, 수공예, 기계 사용법 등에 대한 설명이 많다. 각자의 사전에는 두 가지 상반된 생활 조건이 독립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이웃들의 성향에 대한 단어들이 동시에 강조되지만 낭만적 환상을 조장하는 단어들은 제외한다.
《부모 적응 사전》은 부모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시험관시술이나 대리모 출산과 같은 방법으로 어렵게 자식을 얻게 되었거나, 반대로 자신들의 인생조차 감당하지 못할 나이에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으로 인해 변화되는 부모의 일상을 빠르게 이해시키고 체계적인 준비를 통해 쉽게 적응하도록 돕는다. 출산, 수유, 질병, 수면, 이유식, 장난감, 약, 버릇, 교육 등에 필요한 단어들을 아이의 발달 시기에 맞춰 제공한다. 부모에게 박탈감을 조장할 수 있거나 민간요법으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단어들은 제외한다.
《성인 사전》은 성인식을 앞둔 청소년들에게 청소년과 성인의 차이점을 빠르게 이해시키고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책임과 권리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몸의 구조부터 철학, 예술, 정치, 자연, 경제, 지리, 역사, 사회, 의학, 윤리, 기계 사용법, 음식, 대화 기술, 상표, 언어 등과 관련된 단어들을 총망라한다. 하지만 이 사전이 다루는 범위가 너무 넓어지면 일반적인 사전과 다를 바 없어지기 때문에, 성인을 연령별로 구분하고 각각의 주된 관심사와 지적 수준에 맞는 정보들만을 골라내어 별도의 사전으로 묶는데, 《오십 대의 성인 사전》이 가장 두껍고 《팔십 대의 성인 사전》 이 가장 얇다. 《이십 대의 성인 사전》에는 몸의 구조와 윤리에 대한 단어들이 다수 포함되는데, 성인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그 단어들은 모유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 칠십 대 이상의 성인 사전에서는 그런 단어들을 극히 제한한다.
《민주주의 사전》은 유전적, 신체적, 경제적, 정치적, 언어적 제약 등으로 인해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 갑작스레 이웃이 된 사람들에게 사회에 질병처럼 만연하고 있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빠르게 이해시키고, 상식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변혁과 화합에 필요한 행동 지침에 집중하여 법적 소송과 의학적 치료, 선거, 원조, 개발, 용서, 협상, 전쟁 등에 관련된 단어들을 주로 다루었다. 폭력의 주체와 대상을 구분할 수 없는 단어들은 모두 제외하였다.
《알레르기 사전》은 면역 체계가 교란되어 특정한 음식이나 대상, 상황 등에 갑작스레 과민 반응을 보이게 된 사람들에게 그들 주변에 널려 있는 위험들을 빨리 이해시키고 불안한 환경 속에서 쉽게 적응하도록 돕는다. 의학 서적에 등장하는 모든 알레르기들의 원인 물질과 증상, 치료법에 관련된 단어들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환경 파괴와 생태 복원을 위한 단어들도 추가되었다. 합성염료 잉크에 알레르기를 지닌 독자들을 고려하여 천연염료 잉크로 인쇄되었다.
《한강 사전》은 한강의 발원지부터 종착지까지 이어지는 수계水系에서 토목 공사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한강이 식생과 인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빠르게 이해시키고, 수자원 관리 지침에 쉽게 적응시키기 위한 단어들을 기록한다. 멸종된 어류와 수몰된 마을에 대한 단어들은 포함하였으나 수상 구조물이나 유원지, 수상 스포츠와 관련된 단어들은 제외하였다. 인간이 합리적이고 최소한으로 자연을 관리할 때 비로소 자연이 자정 기능을 발휘하여 인간의 풍요를 돕는다는 교훈을 내포한다.
그리고 그는 여자 모르게 또하나의 사전을 준비하였는데, ‘연애 사전’으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단어들을 담았으나 나이 마흔이 되도록 변변한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한 자신에겐 그런 제목을 사용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어 결국 ‘윤리 사전’이라고 변경하였다. 갑작스럽게 연애 감정에 빠진 자들이 서로를 자세히 이해하고 자신의 욕망에 쉽게 적응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진심을 그녀에게 전달하려는 방편으로 활용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틈만 나면 도서관과 서점을 번갈아 드나들면서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는 문장들을 찾아내어 중요 단어들의 범례로 덧붙였다. 그런데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연애와 관련된 책 속에서 발견된 치명적인 오탈자들이 결코 그의 독서를 멈춰 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가 영원히 그의 인생에서 빠져나간 뒤에 그 책들을 다시 읽어 보았을 때, 마치 알레르기 반응처럼 몸 전체가 가려워지면서 끝내 오탈자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는 사실 또한 아직까지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 상투적인 설명이어서 인정하는 게 몹시 부끄럽기는 하지만, 어설픈 연애의 파국이 《윤리 사전》 때문에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연락도 없이 도장 공방으로 들이닥친 여자의 눈에 정체불명의 원고 뭉치가 들어왔고, 그것이 지니고 있을지도 모를 상품성에 잔뜩 고무된 채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한 그녀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둡고 모호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예민한 감각이 그녀의 얼굴에서 오탈자와도 같은 결점을 발견한 순간 시한폭탄과도 같은 편집증이 작동하고 말았다. 그는 여자가 무슨 이야기를 시작할지 이미 오래전에 들어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장 공방을 나갔다.
이틀이 지나고 다시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녀는 계약서와 도장, 그리고 붉은 볼펜으로 교정이 완전히 끝난 《고래 사전》 원고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미 출판사는 정리했어요. 그리고 전 다시 한 남자의 아내와 두 아이의 엄마로 되돌아갈 것 같아요. 그러니 이 도장도 더이상 필요 없겠네요.”
둥근 도장의 테두리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이루는 음각의 모든 모서리들은 한 인간의 동맥을 단숨에 잘라 낼 수 있을 만큼 붉게 벼려 있었다.
1)“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옮김, 한길사, 2006,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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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김솔
1973 출생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공동 당선
2013 문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