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죽은 단어들의 무덤사전 - '쓰다'의 일곱가지 쓸모 3

이산저산구름 2014. 4. 23. 13:47

 죽은 단어들의 무덤사전 ‘쓰다’의 일곱 가지 쓸모

11월 중순, 수요일 오전 열한 시쯤 도장공방의 문이 열렸을 때, 그는 웅숭깊은 우물의 바닥으로 굽이 뾰족한 하이힐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작업대 앞에 앉아 도장 대신 《도장 사전》을 만들고 있던 그는 너무 놀라 국어사전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는데, 마치 제논의 화살처럼 아무리 손을 멀리 뻗어도 자신의 생애 동안엔 결코 그것을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물끄러미 올려다본 여자의 표정은 너무 투명하고 고요해서 그것을 들여다보는 자의 운명까지 비칠 정도였다. 어쩌면 그때 이미 그는 그 연애의 결말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리 결말을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표정마저 투명해질 때까지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상대방의 얼굴에서 오탈자와도 같은 결점들을 찾아내지 못하여 초조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그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시한폭탄과도 같은 편집증을 작동시키는 바람에, 마흔 살의 나이가 되도록 그는 변변한 연애조차 시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그 여자가 모든 남자들에게 베아트리체로 여겨질 만큼 아름답지는 않았을지라도,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11월 중순 오전 11시쯤 도장공방의 출입문과 가장 어울리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녀의 화장품 냄새와 그의 살냄새가 서로 섞이면서 몽환을 만들어 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평일 오전에 혼자서, 컴퓨터 인장 조각기로 일 분이면 완성할 수 있는 도장을 굳이 도장장이의 조각도에 맡기려고 찾아온 여자의 사연에 그가 미리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수도 있겠다.

 

삼십 대 중반의 여자는 문을 반쯤 열었을 뿐, 공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곳이 도장을 만드는 곳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헌책방 같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한 달여 동안 그는 단 한 개의 도장도 만들지 못했다. 그사이 작업대 위에선 공구함이 자연스레 치워지고 그 자리를 옛 공방의 동료들 이름으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그는 한 번 읽은 책의 내용은 거의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었지만, 사전을 만들고 있는 이상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했으므로 책들을 곧바로 반납할 수 없었다. 그는 각각의 책을 각각의 단어로 정의한 뒤 가나다 순서대로 쌓아놓았기 때문에 도리아식 기둥의 중간 석재를 뽑아내어 건물 전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 없이, 그저 위아래로 누르고 있는 책들의 제목과 내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사이의 책을 충분히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혹시 급히 인감도장을 만들 수 있을까요?”
여자가 이렇게 묻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여자가 《모비 딕》의 편집자이거나 《고래 사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고래 탐사 관광을 준비하고 있거나 해안을 산책하다가 고래의 시체를 발견한―사람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을 피한 채 작업대 위에 쌓아 둔 책들을 눈으로 하나씩 훑어 내려가면서 그녀가 그렇게 물었기 때문에 그의 추정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급히 책들의 신전을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다 공구함을 올려놓아야 했다. 손님을 위해 의자 하나를 더 마련해 두었어야 한다는 사실도 개업한 지 한 달이 지난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자를 내어 주고 선 채 도장 작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하루에 두 개의 도장을 깎을 수 있었지만, 여자에게는 사흘 정도 걸린다고 거짓말을 했다. 혀가 뇌의 통제를 받지 않고 그렇게 말한 이유를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공방의 어수선한 모습을 더이상 손님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독립을 준비하면서 거의 반년 동안 도장을 깎지 않았기 때문에 무뎌졌을 조각도와 손끝의 감각을 벼리기 위해선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으며, 마수걸이 손님에게 감사할 목적으로 좀 더 시간과 정성을 들여 도장을 만들어 주고 싶었거나, 그저 여자를 한 번 더 만나서 오탈자와도 같은 결점들을 찾아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그녀의 손끝이 위태롭게 흔들리더라도, 불행을 서둘러 끝내고 싶은 그녀의 의지만큼은 선명하게 도드라지도록, 그리하여 판사로부터 진위를 의심받지 않을 수 있도록, 이름을 이루는 음각의 모든 모서리들을 날카롭게 돋아 세우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여자는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여자는 내실의 문턱에 걸터앉은 채 그의 작업을 지켜봐야 했고, 그가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손끝의 칼날과 그 여자의 이름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동안, 방 한쪽에 던져 놓은 《고래 사전》의 원고를 몰래 들추어 보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자신의 가방 속에 감춘 뒤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더니, 도장을 찾으러 이틀 뒤에 오겠노라고 말하며 공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자신의 원고가 사라진지도 모른 채 이틀 동안 도장 하나를 완성하느라 온 마음을 썼다. 이미 세 개의 벽조목霹棗木―벼락 맞은 대추나무―을 망가뜨렸는데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틀 뒤 약속대로 여자가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차마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녀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제 마음보다도 더 무거운 도장을 묵묵히 건네면서, 언젠가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여자의 인생에 벼락처럼 떨어져 그녀를 기쁘게 해 주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모두 합해서 얼마죠?”
그는 개업한 뒤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이기 때문에 공짜로 선물하겠다고 대답했다. 여자는 여러 가지 의미들로 해석되기 충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고래 사전》은 얼마에 파실 건데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전업주부로서 십여 년을 살아온 그녀는 이혼을 하게 되면 위자료만으로는 두 아이를 키울 수 없기 때문에 밥벌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행히 대학 선배의 추천으로 조만간 중견 출판사에 근무할 수 있게 될 것 같은데, 만약 《고래 사전》에 대한 전권을 자신에게 허락해 준다면 자신이 직접 출판사를 차리고 책으로 출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직접 만든 계약서를 내밀더니 그로부터 건네받은 도장으로 그 계약서 한쪽에 날인하는 게 아닌가. 이십여 년 동안 수만 개의 도장을 만들어 온 그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느 도장도 자신의 기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는 도장 대신 엄지에 인주를 묻혀 계약서 위에 눌러 찍었다. 온전히 제 인생을 걸어 그 계약의 의미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인데, 너무 오랫동안 조각도를 잡고 살았던 탓에 그의 지문은 더이상 그의 정체성을 확인해 줄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 위 소설의 저작권은 김솔 작가에게, 사용권은 〈쉼표, 마침표.〉에 있으므로 무단 전재와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

 

 다음주, ‘죽은 단어들의 무덤사전③ 쓰다: 마음을 쓰다’ 편이 이어집니다.
 
 

김솔 작가

글_김솔
1973 출생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공동 당선
2013 문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