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단어들의 무덤사전 - '쓰다'의 일곱가지 쓸모 2
《도장 사전》을 만드는 일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고래 사전》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하나는 그가 《도장 사전》을 만드는 일보다 도장을 만드는 일에 더욱 익숙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그걸 만드는 도중에 사랑의 열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귀신을 그리는 건 쉬워도 개나 고양이를 그리는 건 어렵다고, 자신에게 너무 익숙한 것들을 날카로운 연필심 끝으로 찍어 원고지 위로 옮기려 하자 어떤 것은 미모사처럼 몸을 움츠렸고 또 어떤 것들은 복어처럼 가시를 드러내는 바람에 예상보다도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익숙한 일보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역설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도장 사전》을 만들기에 앞서, 그보다 도장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유년기의 기억들과 영원히 결별했던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되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힘들게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을 선언했다.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는 야밤에 가방 하나만을 멘 채 집을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는 심야 고속버스에 올랐다. 고작 십여만 원의 돈과 국어사전 한 권, 겨울 점퍼, 그리고 속옷이 전부였다. 고속버스가 출발하자마자 후회와 두려움으로 멀미가 일었지만 어둠과 피곤이 그에게 재갈을 물렸으므로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새벽 네 시쯤 서울의 터미널에 도착한 그는 대합실 의자에 앉아 정오가 될 때까지 새우잠을 잤다. 그러고는 터미널 부근에 있는 도장공방들을 찾아다니며 다짜고짜 일자리와 잠자리를 요구하였다. 단 한 차례의 성공만으로 모든 굴욕은 상처를 남기지 않은 채 단숨에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비상한 기억력은 자연 치유 방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을 문전박대했던 도장공방의 위치와 상호명과 주인들의 얼굴과 그들의 말을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도장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전혀 없는 열아홉 살의 소년이 허드렛일을 얻고 자재 창고에 딸린 방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능력 덕분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독립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을 버리고 자신 밖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언제라도 그것들을 꺼내 보여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십여 년을 보낸 뒤에 그는 다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번엔 가족같이 지내던 도장공방의 스승과 세 명의 동료들 앞에서였다. 서명만으로도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거나 관공서에서 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도장업자들에겐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졌던 인감 서류마저도 본인 서명 확인서로 대체되면서 도장의 쓸모는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여전히 도장을 필요로 하는 손님들마저도 컴퓨터 인장조각기로 일 분 만에 도장을 완성해 주는 공방을 찾아가거나, 공동구매나 할인쿠폰 등을 통해 파격적인 가격을 제안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로만 몰려들고 있으니, 애당초 유행이나 첨단 기술과는 멀찌감치 거리를 둔 채 나무나 돌의 표면에 붓으로 글씨를 쓰고 조각도로 깎아서 도장을 만드는 곳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도장을 만드는 일 이외엔 다른 재주가 없는 동료들은 폐허와 같은 그곳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청소를 하거나 장기를 두거나 신문의 십자말풀이를 하면서 무위의 시간을 힘겹게 견뎌낼 따름이었다. 참다 못한 스승이 나서서 여성용 액세서리를 만드는 공장으로부터 일거리를 받아 오긴 했으나 경제적 궁핍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해고되지 않기 위해선 스스로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미혼인 그가 가장 먼저 나섰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붓고 대출까지 받아 스승의 도장공방과 마주한 상가의 지하에 도장공방을 차렸다. 작업대 하나와 의자 하나, 전화와 스탠드, 그리고 공구함 한 개를 채우고 나니 숨 쉴 공간조차 부족해졌다. 스승은 자신이 목숨처럼 아끼던 조각도 하나를 선물로 주고 말없이 돌아갔다. 그뒤로 세 명의 옛 동료들이 차례로 찾아와 일자리를 부탁해 왔을 때 그는 그들에게 굴욕을 각인시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손님이 거의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그는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점점 자신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는 파산의 그림자에 초연해지기 위해서라도 그는 《도장 사전》을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했다. 하지만 내용이 정교해질수록 더 많은 단어들이 삭제되거나 교체되어야 했으므로 진척은 거의 없었다. 이는 마치 측량에 사용된 자의 길이가 짧아질수록 영국의 해안선의 길이는 더욱 길어진다는 프랙털Fractal 이론과도 일치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도장 사전》은 훗날 도장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식물 사전》과 《광물 사전》 《동물 사전》, 그리고 《금속 사전》으로 나뉠 예정이었으나 끝내 《도장 사전》을 완성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머지 사전들마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도장 사전》을 완성하기 위해 수십 권의 식물도감과 동물도감, 광물도감을 참조해야 했는데, 도장나무라고도 불리는 회양목을 회나무라고 설명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한눈으로 봐도 흑염소의 뿔로 만든 도장이 분명한데 아시아 검은 물소의 사진을 실은 책도 있었고, 연옥軟玉을 비취翡翠라고 부르는 책까지 접했다. 또한 국어사전에는 상아가 “코끼리의 엄니. 위턱에 나서 입 밖으로 뿔처럼 길게 뻗어 있다. 맑고 연한 노란색이며 단단해서 갈면 갈수록 윤이 난다. 악기, 도장, 물부리 따위의 공예품을 만드는 데 쓴다”라고 정의되어 있지만, ‘야생 동물 및 조류 보호 국제 협약’이 발효된 이후 더이상 인간의 허영심으로부터 코끼리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상아는 《도장 사전》에 추가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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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김솔
1973 출생
2012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공동 당선
2013 문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