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당신들을 위한 기쁨에서 나를 위한 기쁨으로 - 문화융성위원자 김동호

이산저산구름 2013. 12. 26. 10:58

 

당신들을 위한 기쁨에서 나를 위한 기쁨으로 문화융성위원장 김동호
 
  
오십 년 넘게 메모 하시는 수첩 사진

새벽 네 시에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집에서건, 호텔에서건, 술을 마셨건, 마시지 않았건. 그러고는 열한 개의 신문을 보고 집을 나선다. 사십 년도 전에 시작한 테니스는 이삼십 년 아래의 사람들과 같이 친다. 오십 년 넘게 메모를 하고 있으며, 종종 메모한 수첩들을 들춰 본다. 매일같이 소주 80잔에서 100잔을 마셨다. “하루도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그러다 우리 나이로 일흔 살이 되던 2006년 1월 1일부터 술을 딱 끊는다. “집에서 매일 술 먹지 말라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거 한 번 들어봐 줄까? 그랬죠. 허허.” 그 후로는 마시던 술만큼의 양을 물로 대신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얼굴로 유명한, 최근에 문화융성위원장을 맡은 김동호라는 사람의 믿기지 않는 약사略史다.

 

우리가 ‘김동호’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첫 번째 은퇴 이후다. 꽤 기이한 일이다. 그는 문화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의 옛 명칭에서 7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문화 정책을 조정하는 일들을 주로 해 오다 은퇴한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를 알리는 일을 하게 된다. 1995년의 일이다. 그 말고는 누구도 부산국제영화제가 지금처럼 되리라고 믿지 않았던 때다. 영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그 일을 16년간이나 했고, 그만두고서는 <주리>라는 단편 영화를 만든다. 그의 나이 76세 때다. 두 번째 단편 영화를 찍으려던 순간에 다시 공직으로 돌아왔다. 소감을 물었다. “아쉬움이 있긴 있죠. 캐스팅도 다 해 놨고요. 촬영 스케줄도 잡아 놨었고요. 허우샤오셴1도 출연하기로 했었어요.” 요즘의 그는 지방을 누비고 있다. 첫 기차로 내려가서 마지막 기차로 올라오는 일정들. 문화인들의 불만과 요구를 듣는 일들이다. 그는 지방 실정을 모르고 정책을 수립해서 ‘시달’하는 중앙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경계하고 있다.

 

1) 허우샤오셴1947년~: 대만의 영화감독. 대표작으로 <펑꾸이에서 온 소년>, <비정성시>, <희몽인생>, <해상화>, <카페 뤼미에르>, <스리 타임즈> 등이 있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등을 받았다.

 

‘국민 개개인의 생활을 문화와 예술을 통해 풍요롭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문화융성’의 정의.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균형 있게 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문화 예술 분야를 제도적으로 진흥시키는 것과 창조적인 문화 산업을 새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언어의 역할이 바로 서야 한다고 말한다. “언어라는 것은 국가의 한 근간이죠. 언어가 없이는 소통이 안되니까요. 그 나라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이기도 하고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언어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정확한 것. “평론하시는 분들의 글은 우리같이 전문성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워요. 이해하기 쉽고, 간결하게 쓰는 게 좋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말하거나 글을 쓸 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인터뷰 중간 웃고 계신 문화융성위원장 김동호님 사진


 

언어란 국가의 근간입니다
그 나라의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핵심이기도 하죠

 

그는 온화한 절충주의자로 보였다. 때문에 격렬한 단어는 들을 수 없었고, 단어보다는 행간의 침묵과 의심을 통해 뜻을 드러냈다. 이를테면 이런 식. “외래어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회적 현상이니까요. 하지만 정부 측에서 보면 가능한 한 우리말로 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로마자 표기법이라는 원칙과 현장에서의 괴리에 대한 일화가 재미있었다. 부산 영화제가 시작할 때 ‘ㅂ’의 로마자 표기는 ‘P’였는데 표기법이 바뀌어 ‘B’로 써야 했던 것. 그가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에 있는 동안까지는 ‘P’로 쓰기를 고수한다. 부산 영화제는 ‘Piff’였고, 부산 영화제에 오는 영화인들도 ‘Busan’이 아닌 ‘Pusan’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퇴임 이후 ‘P’는 ‘B’로 바뀌었다. “아직도 ‘P’로 쓰는 데가 있어요. 부천 영화제는 ‘비판’이 아니라 ‘피판Pifan’으로 써요.”

 

다시 은퇴하게 되면 영화 찍기가 우선인지 물었다. “1차적으로는 서예죠.” 그러면서 두보의 <청강淸江>의 한 구절을 읊는다. 1963년에 서예로 국전에 입선도 했다. 문화공보부 말단 직원 시절, 토요일 오후마다 적선동의 한 서숙書宿을 다니며 글씨를 썼던 것. 법첩 등의 서예 관련 책을 평생 모아 왔다고. 또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미술. 마크 로스코를 좋아한다는 그는 선긋기부터 배우고 싶다고 했다.그의 사무실에는 직접 구입한 수화 김환기의 판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서예를 다시 하고, 그림에 입문하고, 영화를 찍는 일을 같이 하겠다고 했다. “영화는 우선 재밌어야죠. 장이모의 작품성과 기타노 다케시의 유머를 섞은 그런 영화를 한 편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자신만만하지도, 겸허하지도 않게 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하려는 사람으로 보였다. 남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온 그에게 곧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올 것이다.

 

2)법첩法帖: 옛 사람들의 유명한 필적을 돌 또는 나무 판목에 새기고 탑본하여 글씨를 익히거나 감상할 목적으로 만든 책.

 

김동호
1937년 강원 홍천 출생. 1961년 문화공보부 7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1992년 문화부 차관을, 1995년부터 16년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지냈다. 2012년 단편 영화 <주리>의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1997년 로테르담영화제 등 17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으로 활약했다.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 대한민국 영화대상 공로상,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가 있다. 현재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원장,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글_ 한사유
문학을 전공하고 문학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사진_ 김병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