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새말 8 - 착하게 삽시다 알박기와 속박기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5일장이 열린 장거리를 따라다니다 보면 간간히 들려오는 장꾼들의 걸쭉한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이 놈우 에핀네가 누굴 쇡일려구 요따구 짓을 혀? 요짐이 우떤 시상인디 속박기럴 히서 물견얼 팔어 처먹어.”
고향 장터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던 ‘속박기’는 충북 영동 출신의 소설가 한만수의 소설 《하루》에 나타나는 ‘속백이<속+박-+-이’와도 같은 말이다.
작년 가실에 포도 속백이를 한 놈은 대체 어떤 놈이래유? 포도 질이 안 좋으믄 발아포도로 팔아먹거나 즙을 짜서 팔아도 되는 거잖아유. 그런디도 눈 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상자 위아래만 상품 가치가 있는 것을 넣고서리 안에다는 음료수 공장으로 가거나 거름이나 해야 할 발아포도를 처박아 두믄 워티게 된대유? 《한만수, 하루》
‘속박기’ 혹은 ‘속백이’는 본래 ‘주로 농산물이나 수산물을 팔 때 겉에는 좋은 것을 보이게 두고, 속에는 좋지 않은 것을 섞어 넣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속박기’ 장사꾼은 질이 나쁜 상품을 속에 감추고 질 좋은 상품만 겉으로 드러내어 좋은 가격에 파는 것이기 때문에 부당 이익을 챙기는 셈이다. 즉 ‘속박기’는 부당 거래인 것이다. 예전엔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정보의 공유가 쉽고 빠르게 이루어지는 이 시대에는 ‘속박기’가 통할 리 만무하다. 그러한 수법을 쓰다가 장사 말아먹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 기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떠돌이손님’을 상대하는 노점에서는 여전히 ‘속박기’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하남 지역 주요 도로변에서 과일을 판매하는 일부 노점상들의 속박기 행위가 기승을 부려 소비자들의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 이 가운데 일부 노점상은 상품의 겉만 번듯한 '속박기' 수법을 일삼아 소비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교차로 저널, 2013. 3. 27.》
이런 ‘속박기’와 닮은 말이 있다. 속칭 ‘알박기’이다. 재개발과 신도시 개발의 열풍과 함께 새롭게 만들어진 말 ‘알박기’는 2000년 이후 신문 기사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2010년 이후에는 문학 작품 속에서도 그 모습을 종종 드러내기 시작했다.
‘알박기’ 투기 분양가 올린다. 《매일경제, 2002. 3. 6.》
동대문 일대 ‘알박기’ 성행. 상가 예정 부지 사둔 뒤 거액 요구 《한국경제, 2002. 6. 25.》
개발 부지 ‘알박기’ 23억 챙겨 《동아일보, 2003. 11. 3.》
“그 사람들처럼 알박기라도 하려고요? 언제까지 우리 피를 말릴 건지 말해 보세요. 요새 장사도 안 되는데.” 약국 아줌마에 따르면 목사와 그의 부인은 애당초 교회보다 분양권에 더 큰 목적을 두고 이 동네에 왔다는 것이다. 《김성중, 게발 선인장》
대개 삼사백 평에서 작은 것은 백여 평짜리로 총 사천오백여 평을 확보했는데 그중 작은 것들은 대개는 보기 좋은 큰 땅 주변에 알박기로 매입해 묻어 두는 물건들이었다. 《황석영, 강남몽》
‘알박기’는 ‘비싼 가격으로 되팔기 위해 개발이 예정된 지역의 땅 일부를 사는 것’이다. ‘알박기’로 사들이는 땅은 개발 예정 지역의 알짜배기 땅이 아니다. ‘알박기’ 땅은 개발 지역으로 선정되기 이전에는 주변의 땅에 비해 별 볼 일 없는 땅이었다. 그 땅을 헐값에 사들인 후 매입자가 개발업자에게 팔지 않고 버티면서 주변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비싸게 땅값을 받아 내려는 수법이 ‘알박기’이다.
‘알박기’가 마치 ‘속박기’의 후신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 말은 많이 닮았다. 형태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부당 거래를 통해 부정 이익을 취하려는 수법이라는 점에서도, 한탕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도 두 말은 닮은 꼴이다.
나는 알박기 집과 전등이 밝혀져 있는 우리 집을 번갈아 보고는 몸을 돌려 담장 안에서 나오려고 시멘트 무지를 에돌았다. 《조원중국 동포 작가, 뿌넝숴, 뿌넝숴! 나무의 전설》
중국 동포 작가의 소설 속에서도 ‘알박기’가 나타난다. 그런데 한국의 ‘알박기’와 중국의 ‘알박기’는 그 대상이 서로 다르다. 한국에서 ‘알박기’의 대상은 ‘땅’이지만, 중국에서는 그 대상이 ‘집’이다. 중국에서 집은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있지만, 땅은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알박기’는 일부 지역 사회에서는 ‘속박기’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시방두 알박기럴 안 헌다구 볼 수넌 없지. 양심머리 웂는 사람덜언 감재 같은 거 팔아 묵음서도 혹간 알박기럴 혀.”
최근에는 ‘알박기’가 ‘선점’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구 지역에 경찰력을 낭비하는 '집회 신고 알박기'가 성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주로 집회 장소를 미리 선점해 상대방의 시위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의 유령 집회로 강력한 처벌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중략> 백화점, 대형마트, 병원 등은 건물 주변 집회 장소를 선점해 자신들을 상대로 한 시위를 차단하기 위한 집회 신고 알박기가 성행하고 있다. 《경북일보, 2013. 10. 29.》
‘알박기’와 ‘속박기’ 모두 비뚤어진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이다. 물질의 가치가 최고의 가치로 치부되는 이 사회에서 믿음과 신뢰, 공동체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니길 기대해 볼 뿐이다.
글_이길재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새어휘부 부장.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학 박사. 전북대 인문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호남문화정보시스템 책임연구원 등을 지냈으며 논문으로는 <전이지대의 언어 변이 연구>, <전라방언의 중방언권 설정을 위한 인문지리학적 접근> 등이 있고, 저서로는 <언어와 대중매체>,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