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59세의 사유 - 문인이 말하는 한글, 아름다운 문장(12 시인 이우성 편)

이산저산구름 2013. 8. 28. 12:22

59세의 사유

 
 나는 친구들에게 우리 지식인들은 왜 칼 마르크스를 그토록 오랫동안 지지했냐고 물었다. 아무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칼 마르크스의 이념을 수용하는 것은 멋있어 보이는데, 케인즈의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지 않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만일 내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다면 1951년 한국에서 죽거나, 월북해 교사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저 방 안에서 앉아 혁명가라고 떠들어 대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백남준, 《비디오 사건-비디오 공간》 도록 중 <59세의 사유> 마지막 부분

 
 

백남준은 말했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 백남준은 그렇게 했고 이겼다. 짐작하건대 백남준은 철없는 반항아였다. 하지 말라고 할 만한 일들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르크스와 ‘멋’을 한 문장에 배치하는 짓을 못했겠지. 대단한 이념쯤 액세서리로 치부할 수 있는 게 백남준이었다. 각설하고, 머저리 같은 논쟁을 일삼으며 이념을 들먹이는 높은 양반들을 보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멋’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구려…… 총 한 자루씩 쥐어 주고 1951년이라는 시간대로 밀어 넣고 싶다. 도망 다니느라 바쁠 테지만.

 

이우성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무럭무럭 구덩이>가 당선되며 등단했다. 《GQ》, 《DAZED AND CONFUSED》를 거쳐 현재 《ARENA》의 편집자피처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시집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를 냈다.